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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금속활자, 정보 생산 아니라 왕권의 상징
조선시대 금속활자, 정보 생산 아니라 왕권의 상징
  • 유무수
  • 승인 2022.09.02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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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활자본색』 이재정 지음 | 책과함께 | 304쪽

계미자·경오자·을해자 등 82만 점 주목해 분석
노비출신 과학자 장영실도 갑인자 제작에 기여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고려시대 우리나라 사람이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먼저인데 왜 나중에 나온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더 유명한가. 20년 넘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활자를 연구해온 이재정 학예연구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조선시대 활자 82만 점에 주목했다. 이렇게 많은 금속활자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사례지만 이 활자들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고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저자는 기록물들을 통해 조선시대 활자의 의미와 가치를 추적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수십 차례 금속활자가 제작됐다. 조선시대에 주로 사용한 문자인 한자를 표현하는 금속활자를 만들 때는 각각의 의미에 대응하는 글자를 제작해야 하기에 최소 10만 자를 만들었다. 대부분 활자의 이름은 활자가 만들어진 해의 60간지에 따라 지어졌다. 태종은 1403년(계미년)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를 만들었다. 그 이후, 세종, 문종, 세조, 성종, 중종, 선도, 광해군,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철종 등은 새로운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책을 대량으로 인쇄하고 지식을 널리 보급하고자 한다면 금속활자는 비효율적이다. 대량인쇄에는 목판이 효율적이다. 그런데 왜 금속활자를 만들었는가. 조선후기 정조를 도와 활자를 만들었던 서명응은 「규장자서기」라는 글에서 세종 때 주조한 활자를 제왕의 상징이자 보물로 표현했다. 저자는 금속활자는 “왕권의 상징”이었다고 해석했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인 “정보의 대량생산과 공유의 길을 열고 근대 사회가 펼쳐지는 계기”와 대비된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글씨체는 조선시대에 손꼽히는 명필이었고 그의 필체로 찍은 금속활자는 ‘경오자’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할 때 안평대군은 세조와 정치적 노선을 달리했다. 결국 안평대군은 숙청됐고 세조는 즉위 후 안평대군의 활자를 녹여 새로운 활자인 ‘을해자’를 만들었다. 금속활자가 권력의 상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세종대왕이 심혈을 기울여 창제한 훈민정음은 한자문화의 관성에 매몰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공식문자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글도 활자로 만들어져서 인쇄에도 사용됐으며, 한글 활자를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등의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한글을 최초로 접할 수 있는 자료인 『훈민정음해례본』(1446)의 서체는 한 음절을 사각형 안에 모아쓰기 방식으로 되어 있다. 1455년에 붓글씨 느낌의 서체가 등장했고 17세기 이후에는 초성·중성·종성의 비율이 변화되어 사각형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17∼18세기 궁중에서 한글 손글씨 쓰기를 도맡아하는 서사상궁들에 의해 붓글씨의 꺾임이 있는 궁체가 퍼져나갔다. “세련된 서체, 여성적인 서체, 민족상징 서체”로 인식된 궁체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일보와 독립신문, 1960∼1970년대 교과서에도 사용됐다.

 

활자를 원고대로 조립하는 모습. 오늘날 식자에 해당한다. 사진=국가문화유산포털

왕명에 의해 활자를 만들고 책을 인쇄하는 과정에 판을 짜고, 종이를 만들고, 인쇄작업을 했던 수많은 기술자와 장인들은 “문치주의의 숨은 공신들”이다. 이들의 흔적은 거의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은데 『세종실록』에 조선 금속활자의 백미로 평가되는 ‘갑인자’를 만든 사람들의 이름 중에 노비출신의 과학자 ‘장영실’이 언급되어 있다. 성종에서 중종까지 왕의 명령 중에서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을 뽑아 간행한 법전 『대전후속록』에는 “한 권에 한 자의 오자가 있을 때 태 30대에 처한다”라는 처벌규정이 있다. 다섯 자 이상 틀리면 파직이었다. 책은 그만큼 귀중품이고 권위의 상징이었다. 정조 때 책 간행을 감독했던 정약용이 파직된 것도 완성된 책에서 발견된 흠결 때문이었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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