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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계풍경]건축비평의 새 흐름
[예술계풍경]건축비평의 새 흐름
  • 김정아 기자
  • 승인 2000.11.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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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띠는 실제비평 “이제 동시대의 건축물을 논하련다”

최근 건축관련 출판물 중엔 동시대 건축물에 주목하는 실제비평이 여러권 눈에 띤다. 특히 임석재 이화여대 교수의 ‘한국적 추상논의’(북하우스 刊)와 건축비평가 전진삼이 책임기획한 ‘건축의 바다 1,2,3,4’(시공문화사 刊)는 양자 모두 연작의 1부로 최신건물 비평이라는 새로운 건축담론의 방향을 예고한다.

이런 비평엔 건축이 건축가의 창작물, 즉 예술작품이라는 건축철학이 담겨 있다. 물론 건축을 예술의 한 장르로 보는 관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만신전’에서 가우디의 ‘바뜨요저택’까지 우리는 숭고한 건물들 앞에서 옷깃을 여민다. 그러나 우리동네에 요즈음에 세워진 주택과 상가에서 미학적 가치를 찾는 비평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새로운 시도다.

“동네 건축에도 미학은 있다”

물론 비판도 없지 않다. 분석 대상이 되는 건물을 지은 이는 지금 현장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들이다. 건축가는 예술로 ‘밥통’의 핑계를 삼고, 비평가는 이런저런 이유로 주례비평에 골몰하는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동시대 건축가 또는 건축물에 대한 실제비평을 시도하는 평자들은 일단 의심을 살 만하다. 지난달 건축잡지 ‘포아’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건축가의 첫 번째 자질을 묻는 질문에 ‘도덕성’이 1위로 꼽혔다. 오늘날 건축계의 파행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한편 건축의 예술적 자율성 자체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건축을 예술이라고 하기엔 자본에의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주장이다. 아무리 탁월한 건축가라 하더라도 자본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며, 아무리 예술적인 건축이라 하더라도 상품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극단적인 논자들은 달동네처럼 건축가가 없는 건물이나 우리나라 건축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집장사용 ‘허가방’ 건축이 오히려 동시대 건축의 정신을 보여준다는 주장도 펼친다.

그러나 최소한 건축가들은 건축이 예술이어야 한다는 당위까지 버리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의 건축권력이 그런 당위를 지지해줄만큼 합리적이 아님을 비판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두가지 실제비평시리즈 역시 일단 건축영역의 예술적 자율성과 건축가의 창조적 의지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건축의 바다 총서’ 각 권은 건축가, 사진가, 비평가 장으로 구성되며, 한 채의 건물-텍스트에 존재하는 다양한 의미의 층위를 제시한다. 건축가의 의도와 비평가의 논평, 설계도면과 건물사진이 부딪히며 텍스트에 대한 다양하고 개방적인 해석을 열어놓는다. 결정적인 해석지평은 모호한 채, 고립된 건축물이 분절된 의미단위로 존재하는 것은 아쉽지만, 오브제 분석의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저작을 이루는 글/그림의 건전한 취향은 대중의 안목을 끌어주되 압도하지 않는 겸손한 해석태도와도 어울린다.

‘한국적 추상논의’ 역시 건축의 예술적 자율성에 대한 신념에서 출발하지만, 건축물을 독립된 오브제로 보지는 않는다. 건축가의 의지를 건축미의 중요한 범주로 보지만, 그런 의지로 제어되지 않는 상황과 시대와 양식 역시 고려한다. 특정 건축가의 특정 건축물을 분석대상으로 삼지만 이때 해당 건물은 시공간의 맥락 속에서, 그리고 건축 담론의 지도 속에서 해석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건축의 사회적 의미와 윤리의 문제를 건축물의 예술적 구조 내부에서 해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윤리적 가치를 구현한 작품이 ‘미학적으로도’ 우월한 작품이다. 건축 안과 밖의 ‘소통성’이나 출입문의 ‘예절’, 그리고 ‘용기’ 등의 어휘가 건축물의 완성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이런 방법론은 건축물의 의도적 진술을 중시하는 실제비평에 대한 대안으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적 추상논의’ 이전에 실제비평의 생산성을 증명했던 이종건의 ‘해방의 건축’(발언 刊)에선 건축가의 의도를 복원하는 방법론을 취할 때 생기는 난감한 역설이 제시된 바 있다. “건축가 조건영의 ‘최익수정형외과’는 엄청난 힘을 품은 원통이 검정색 톤을 지닌 채, 마치 가슴에 구멍 뚫리듯 사각형의 비움을 담고있어 프롤레타리아의 정념이 더욱 강하다”는 평 뒤에 “조건영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형태 연출이 ‘지극히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상업주의적 동기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는 설명이 이어지는 식이다.

건축의 사회성과 윤리 강조하는 ‘한국적…’

‘한국적 추상논의’의 저자는 건축의 예술적 자율성을 이론적으로 설득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건축주의 요구, 건축비 제한, 프로그램 특성 등 현실적 사안들이 배제되고 건축내적 문제만 다뤄진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면도 있다. 그러나 이론가의 분석틀과 애호가의 안목을 통해서 독자로 하여금 사회적 윤리적 범주의 미학적 적절성을 체험케 한다는 장점은 지적돼야 하겠다.

건축을 예술단위가 아닌 경제단위로 추락시키는 작금의 건축현실 속에서, 윤리적 가치의 미학적 구현을 논한다는 것은 너무 앞선 이상이라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포기가 능사는 아니다. “건물 하나 잘 만들었다고 한 시대 사회 전반의 생활양식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건축가들이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건축가는 이런 상황을 건축적으로 기록하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한국적 추상논의’ 저자의 고민은 건축 뿐 아니라 문화적 자율성을 선사 받은 모든 영역에 해당될 것 같다.

<김정아 기자 anonio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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