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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도 신뢰도 없다
원칙도 신뢰도 없다
  • 최태욱 한림대
  • 승인 2006.03.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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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논평: (1)다자주의, 지역주의, 한미 FTA

▲최태욱/한림대·국제정치 ©
다자주의(multilateralism)는 오랜 동안 우리나라 대외통상정책의 유일한 기조였다. 한국 통상정책의 수립과 집행은 GATT와 그를 이은 WTO 체제 등 범세계적인 다자주의 틀 내에서만 이루어져 온 것이다. EU나 NAFTA 등 지역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이 명백한 대세로 자리 잡은 1990년대 초·중반까지도 우리 정부는 지역주의적 대안의 모색에 무관심했다. 미국이 이끄는 다자적 통상질서의 유지로 충분하며, 우리로서는 그 틀 안에서 국제화 혹은 세계화 지향의 통상정책을 수행해가면 그만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것이다. 다자주의 원칙의 고수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충실한 협력국가로서 얻을 수 있는 경제 및 안보 영역에서의 일반적 혜택 외에도 우리에게 많은 실익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다자협상과정의 다원주의적 운영은 우리의 취약 산업인 농업이나 서비스산업 등에서의 시장 개방 연기나 민감 품목의 유예 등을 가능케 하였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국가들과의 사안별 연대 전략이 유효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지역주의(regionalism) 기조를 추가로 수용한 것은 1990년대 말이었다. 그 배경에는 당시 동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가 있었다. 이는 우리를 비롯한 역내 국가들 모두에게 세계화 압력에 대한 지역주의적 공동 대응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다. 동남아 10개국과 동북아 3개국이 ‘ASEAN+3’의 형태로 모였고, 한국은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의 구체화 작업을 주도했다. FTA라는 양자주의적 통상정책도 기본적으로는 지역주의 발전을 위한 하위 전략으로서 그 정당성을 확보하였고, 한일 FTA는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된 첫 사업이었다. 그렇다고 다자주의 원칙을 저버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지역주의 발전을 도모한다고 하여 다자주의 체제가 주는 혜택과 실익을 포기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양자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북아시대’의 구현을 최상위 외교목표로 표방한 노무현 정부가 다자주의 원칙 하의 지역주의 추진 기조를 그대로 계승·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미 FTA는 두 가지 점에서 현 정부의 통상정책 기조에 대해 다소간의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하나는 그간 우리가 누려온 다자주의 협상의 이점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 발생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협상력을 보유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대미 협상력은, 특히 양자주의 환경 하에서의 그것은 태부족일 뿐이다. WTO 틀에서의 다자주의적 시장개방 협상 덕에 연기 혹은 유예가 가능했던 농산물 시장과 법률·의료·교육·금융·영화 등의 서비스 시장도 미국과의 양자 간 협상에 의해서는 대책 마련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 확보도 하지 못한 채 열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 노동자나 중소상공인들이 받을 피해도 막대할 것이 예상된다. 아직도 저급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우리의 사회안전망이나 복지 및 보상 체계를 감안할 때 급속한 시장개방이 결과할 사회 불안과 혼란은 불을 보듯 명확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내 대책의 확보와 그를 위한 시간이다. 다자주의 원칙으로 벌수 있는 시간을 왜 양자주의의 채택으로 버리려 하는가?


다른 하나는 한미 FTA의 동북아 혹은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과의 정합성 여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동(북)아시아 지역주의의 성패는 상당 부분 역내 핵심 국가인 한·중·일 3국의 협력 여부에 달려있다. 한미 FTA의 체결은 한·미·일 공조 체제의 강화 효과를 낳을 것이 분명하다. 만일 이 효과가 중국을 배제한 채 발생한다면, 즉 중국의 일본 및 미국과의 갈등관계는 그대로인 채 한·미·일 3국간의 우호관계만이 강화된다면, 결국 중국 소외 현상이 일어나 동(북)아시아에서의 지역주의 발전은 요원한 것이 될 수 있다. 1990년대 말 우리 정부가 뒤늦게나마 지역주의를 수용한 본래 취지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때보다 더욱 심도 깊게 주요국들은 지금 국제체제의 지역주의적 재편 작업에 몰두 중이다. 미국 역시 NAFTA(North American FTA)를 FTAA(FTA of the Americas)로 발전시켜 자신이 주도하는 지역주의의 틀을 북미주에서 전미주로 확대·심화키기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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