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민 / 충남대·경제학 © |
최소한 내 주위의 세상이 지금보다 한 발짝은 왼편에 가 있던 시절, 어느 “좌경용공” 서적을 주로 출간하던 사회과학출판사의 책표지에는 항상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이다”라는 구절이 씌어져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이 구절이 차마 어려워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 출판사가 즐겨 다루던, 유달리 실천을 강조하였던 사회주의혁명가 레닌(!)의 말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다. 결국 모든 이론은 회색의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변두리중학교 물상실에서 겨우 95도에 끓어버리던 물과 당황스러워 하던 물상선생님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지만, 그나마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도 달라서 실험조차 불가능하다. 더욱이 실험의 잠재적 대상은 각자 생각과 의지를 갖춘 인간이다. 비이커 속에 넣고 가열되는 물 분자가 끓지 않기 위해 저항하는 법은 없지만, 특히 집단화된 세력으로서의 인간은 버티지 않는 법이 없다. 결국 “경제적 형태의 분석에는 현미경도 시약도 소용이 없고 추상력이 이것을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 초판 서문). 추상력이란 결국 우리가 관찰하고 분석하는 대상에서 무엇이 본질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가를 가려내는 힘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추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의 생각 자체가 그 자신이 먹는 것, 그 자신이 사는 곳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지적 재산권에 대해서는 매우 진보적인 사고를 가졌던 제퍼슨이 노예제도를 당연시하면서 스스로 노예주였던 것처럼, 무산계급의 혁명을 꿈꾸었던 마르크스는 빈궁한 환경 속에서도 아내가 친정에서 데려온 하녀 헬레네 델무트를 거느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로부터 사생아까지 얻었다. 그것이 “붉은 악마” 마르크스의 참 모습이라고 비난하는 것 못지않게, 마르크스와 그녀의 사랑을 지순한 그 무엇으로 미화해보려는 것 또한 부질없는 상상일 따름이다.
어쨌든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는 명제는 소박하게 말하자면 모든 이론은 절대적인 진리라기보다는 시대적·사회적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이론을 주장하는 이론가의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한계라는 것이 결코 거창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부딪히고 느끼는 매우 직관적이고 소박한 감정으로부터 출발하여 논리적으로 다듬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모든 이론의 저변에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다는 말도 그저 이것을 어렵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
이러한 상념의 나래가 자칫 너도 옳고 나도 옳다라는 황희정승식 주장이나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탈근대적 주장까지 펼쳐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론 A와 이론 B는 각각 물질적 이해관계 A와 B에 대응하면서, 서로의 영역을 건드리면서 대립·투쟁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단체와 교육부가 “경제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상호양해각서를 교환하고,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지닌 편향성을 비판하고 일견 탈근대를 가장한 “재인식”을 통해 또 하나의 편향성을 강요하는 작금의 상황이야말로, 당신이 먹는 것과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주는 이 자본주의사회의 치열한 전선을 드러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