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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전통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 신정근
  • 승인 2022.08.24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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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가 말하다_ 『신원인(新原人) : 사람다움의 새로운 정립을 위하여』 펑유란 지음 | 신정근 옮김 | 필로소픽 | 388쪽

펑유란의 정원육서 중 하나인 ‘신원인’ 옮겨
새로운 시대의 사상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

펑유란(馮友蘭, 1895~1990)은 동양철학계에게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동양철학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시작하려면 통과 의례처럼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를 읽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펑유란은 탁월한 철학사가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실 펑유란은 철학사가로 한정할 수 없다. 그이는 중일전쟁이 진행 중이던 1930년대에 사상서를 집필하여 중국의 미래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 작업이 바로 『신리학新理學』(1938), 『신사론新事論』(1940),  『신세훈新世訓』(1940), 『신원인新原人』(1943), 『신원도新原道』(1945), 『신지언新知言』(1946), 즉 “정원육서貞元六書”의 출간이다. 정원은 하나의 흐름이 매듭지어지고 새로운 기원이 시작된다는 맥락을 나타낸다.  

두 분야의 저술로 펑유란의 묘비명에는 “세 차례의 철학사에서 고금의 철학을 해석하고, 육서에서 현대적 재해석의 체계를 세웠다(三史釋古今, 六書紀貞元)”라며 10글자가 새겨졌다. 이 책은 정원육서 중에 『신원인』을 옮겼다. “신원인(新原人)”의 제목이 낯설게 느껴진다. 원(原)은 근본을 캐들어가는 산문의 형식을 가리킨다. 당나라 한유(韓愈)의 원인(原人)이 이런 산문의 대표적인 글이다. “원인”은 인간의 근원을 캐묻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옮긴다면 “인간의 근원을 찾아서”라는 시적 제목이거나 “사람이란 무엇인가?”와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처럼 학술적 제목으로 바꿀 수 있다.

펑유란은 왜 “원인”에다 “신” 자를 덧보탰을까. 이는 펑유란이 1930년대의 시공간에서 동양철학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서양 철학의 방법을 원용하여 사람다움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의도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 인간과 인공지능의 경계가 날로 흐릿해지는 지적 생태계를 맞이하고 있다. 펑유란이 수행했던 작업을 패러디하면 “신신원인(新新原人)”을 고민할 때가 되었다.

펑유란이 1930년대에서 사람다움을 물으면서 “경계(境界)”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과거의 언어라면 그냥 “성인이 되어라!”거나 “인욕(人欲)을 넘어 천리(天理)를 따라라!”라고 할 수 있다. 펑유란은 더 이상 이러한 요구와 언어가 현실에 통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이는 “경계”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이 이해에만 함몰되지 않고 도덕을 넘어 천지와 같은 지평에 서는 또 다른 삶을 지향할 수 있는 가능성과 지평을 열고자 했다. 이로 인해 자연경계, 공리경계, 도덕경계, 천지 경계를 구분하여 논의하고 있다. 그이는 과거의 철학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사상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사람은 진일보한 각해를 가지면 대전(大全)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본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마침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한 상(형상) 아래에서’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사람은 이런 새로운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모든 사물은 그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이런 새로운 의미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경계에 들게 하는데, 이런 새로운 경계는 우리가 말하는 천지 경계이다.”(234쪽)

이처럼 펑유란은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가 『인간사화』에서 사(詞)를 중심으로 다루었던 경계의 논의를 우주와 철학의 영역으로 넓히고 있다. 이후 경계는 철학, 도덕, 윤리만이 아니라 예술, 미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금도 경계는 예술 창작과 예술 작품의 비평만이 아니라 우주적 인생의 가치를 대표하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신원인』의 번역으로 “경계” 개념이 철학과 예술 영역에서 보다 더 깊이 있게 논의되는 바탕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신원인』은 중일 전쟁 중에 쓴 글이기에 출처를 제대로 밝히지 않아 읽기가 다소 불편하다. 번역에서 긴 시간을 들여 가능한 모든 출처를 밝히고 인물과 사건 그리고 전문 개념에 대해 모두 650여 개의 주석을 달았다. 그 결과 이 책은 『신원인』의 역서이면서 주석서이면서 해설서가 되었다. 나는 역자이면서 학자로서 머릿속을 헤매던 문제, 즉 전통 철학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안에 도움을 받았다. 그 길이 “신신원인”으로 나아갈 방향이리라.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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