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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철학교수와의 독서여행
[스케치]철학교수와의 독서여행
  • 이옥진 기자
  • 승인 2001.07.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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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12 08:57:48
전북 정읍의 삼신산 아래 백학농원. 여행길이라기엔 부담스런 짐보따리들을 든 2, 30대의 학생들이 산중턱 고즈넉한 그 곳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바다도, 강도 없는 이곳 산골 농원에서 나흘간의 여정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들의 여행은 세속의 ‘휴가’와는 달랐다. 큰 가방을 짊어지고 나타난 이들의 여행에서 한가로운 휴식과 레크리에이션을 연상한다면 큰 오산이다. 3박 4일의 여행을 준비해 챙긴 그들의 큰 가방 속은 온통 책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이 모임은 ‘독서여행’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그들은 다만, 도시에서의 공부를 자연 속으로 옮겨온 것일 뿐이었다. 하루 12시간의 공부와 2시간의 산행을 제외하면 숙식 외의 여유시간이 남지 않는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기꺼운 마음에 일종의 설레임마저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이 ‘여행’은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철학)가 지난 1999년부터 실험하고 있는 새로운 모임의 형태이다. 독서와 산행만으로 한 달 가량 살아내면 어떤 사람이든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으로 이 여행을 구상했다고 한다.

산행은 모임이 선택한 또 다른 ‘공부법’이다. 산길을 걸으며 그들은 몸공부를 한다. 책상물림인 ‘독서인’들의 문약을 보완해 줄뿐더러 산 그 자체가 훌륭한 공부의 터전이 된다. 산은 정상에 올라 정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헤메이고 길을 내며 찾아 나서게 하는 ‘그리움의 대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등산’ 이라는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어휘를 버리고 산과 만나고 사귀어가려는 지향을 담아 ‘산행’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번 독서여행은 ‘文化·文禍·紋和’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독서와 토의는 대개 넷문화와 디지털매체에 대한 성찰, 매체에 대한 메타적 시선의 훈련, 종교와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를 넘어서는 자유로의 개인들의 연대에 관한 문제로 집중됐다. 사방이 권태롭기마저 한 녹색의 자연 속, 여행은 언제나 돌아옴을 전제로 하고 거주하지 않는 곳에서는 싹이 트지 않는 법이라 했지만, 그들의 논의는 어느새 새로운 시대에 대한 반성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그것은 ‘文禍’의 한가운데 이미 들어서 있는 나와 너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이어지는 공부의 연쇄와 무더위 속에 지치는 ‘同學‘들을 위해 산행을 놀이로 대체하며 ‘유연성’을 보이기도 했던 독서’여행’ 모임에서의 모든 논의는, 결국엔 새로운 형태의 연대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속깊은 만남과 이해가 결핍된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터에 드리워진 불화의 징조 속에서도, 외따로 서있는 자율적 개인들에게도, 연대의 희망은 존재한다는 것. 허황한 논의가 아닐 수 있었던 것은 독서여행에 모인 이들이 그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30여명의 낯모르는 여행동무들, 학부초년생에서 현직 대학강사에 이르기까지, 20대에 새내기에서 40대 중년에 걸친 참가자들, 그들의 존재 자체는 희미하고 불안정하게 보이는 잠재적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만남의 가능성이었다. 김 교수의 홈페이지(장미와주판 www.sophy.pe.kr) 에 들르던 이들이 ‘온라인’의 엿보기와 수줍음, 투명인간의 세월을 마감하고 눈빛과 낯빛을 ‘오프라인’에 드러낸 그 사연들은 자율적인 인간들의 한시적 공동체에 대한 벅찬 사례였다. “강연에서 잠깐 만났던 김영민 교수님의 홈페이지를 통해 이번 여행이 있음을 알고 참여를 결심했다”던 이나, “우연히 들렀던 사이트에서 진지하고 글맛 있는 글쓰기가 진행되고 있음에 끌려 여행까지 오게 됐다”는 참가자의 말은 독서여행이라는 실험결과를 부분적으로 평가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을 끝으로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들이 한 곳을 향해 ‘떠남’을 시도했던 것은 여행기간 내내 곱씹고 되뇌었던 ‘동무’라는 지향점 덕분이었다. 김 교수의 구분법에 따르자면, 정서적 친밀도로 인해 만남과 헤어짐이 결정되고 마는 사이인 ‘친구’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사귀고 격조해도 신뢰가 줄지 않으며 굳이 가까이 있지 않아도 연대의 몸짓에 인색하지 않는 ‘동무’가 되자는 설명은 독서여행에 대한 존재증명이라 여겨졌다.
이옥진 기자 zo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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