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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동양철학계 기존 학설 ‘재해석’ 무드 고조
흐름: 동양철학계 기존 학설 ‘재해석’ 무드 고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3.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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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왜 감정을 논했나…다산과의 연속성도 제기

▲퇴계 이황(왼쪽)과 감천 담약수. ©

요즘 동양철학계는 기존 학설에 대한 재해석의 무드를 확실히 탔다. 이 같은 현상은 낯선 얼굴들이 주도한다. 지난해 서양 및 불교철학을 전공한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가 정약용을 비판한 것이 그 사례. 그런 한 교수가 이번엔 성리학의 빅브라더인 주희의 철학을 분석해 화제다.

‘철학사상’ 지난해 겨울호에 실린 ‘주희 철학에서 未發時 知覺의 의미’가 그것인데 이는 기존 ‘상식’에서 볼 때 말도 안 되는 논문이다. “마음이 사물과의 접촉을 통해 아직 발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未發’을, 사물과 접촉해서 생기는 감각인 ‘知覺’과 연결한 “미발시 지각”이라는 용어는 모순인 것이다. ‘미발’은 희노애락과 思慮가 발생하지 않은 태아의 고요한 잠과 같은 상태이다. 그러나 한 교수는 미발 시에도 지각이 있을 수 있고, 이것이 주희에 의해 주창되었다고 주장한다.

“未發에서도 知覺은 가능하다”

한 교수는 “미발 지각은 의식적인 사려분별보다 더 깊이에서 작용하는 비의도적이고 비명시적인 심층적 지각”이라고 그 특징을 풀어쓴다. 그리고 “미발 지각은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생물지심 내지 천지지심의 활동성으로서 능동적 지각”임을 논증하고 있다. 하지만 한 교수는 이것이 불교적 깨달음의 경지(空寂靈知)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이유는 주희는 미발지각의 상태에서조차 能(주관)과 所(객관)의 구별을 분명히 하는 데 비해, 불교의 공부라는 것은 주객과 자타 등 모든 분별을 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주희의 ‘미발지각’은 “인간 마음의 활동성을 일상적 의식보다 더 심층의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한 주희의 흔적이며 “마음은 그 소각자를 명료히 포착할 수 있는 已發에서만 마음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나 의지적인 표층 활동이 멎는 순간에도 간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교수는 이런 미발지각을 깨어있는 마음의 눈으로 관찰하고, 그에 대해 직접적으로 통찰할 것을 주문한다. 그게 없다면 “자기 자신을 깨달을 수 있는가”에 대한 모든 대답은 그저 “짐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매서운’ 결론에 이른다.

한 교수가 미시적인 차원에서 해석학적 독법을 보였다면, 같은 학술지에 실린 조남호 평화대학원대 교수의 ‘이황 철학의 새로운 해석’이란 글은 이론으로 벌개진 눈을 바람부는 숲을 바라보며 씻어내고 이황이라는 큰 그림을 조망하자고 제의한다. 이 논문에서 조 교수는 기존의 이황철학에 대한 연구가 “리발설과 사단칠정론에 집중”되고 “이론적 정합성에만 매달린 나머지, 왜 이황은 사단칠정이란 인간의 감정에 주목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라고 지적한다. 조 교수는 기존 연구자들이 “이황이 사변적 원리나 이념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기보다는 주자학적 원리를 일상생활 속에 드러난 마음으로 확증하고, 반대로 자신의 드러난 마음을 성찰함으로써 주자학적 원리를 해석”한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황이 ‘사단칠정론’에 매달린 이유가 그것이 “삶 속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마음이나 감정의 분류학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단칠정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져온 개념이 바로 ‘리발설’이라고  정리한다. 즉, 지금까지는 이 ‘설명어’가 해명되어야 할 철학적 주제로 간주됨으로써, 결국 주객이 전도되는 효과를 낳았다는 게 조 교수의 관찰이다.

또한 그는 “이황철학의 독자성” 云云을 넘어서자고 제안한다. 왜냐하면 이황은 주자철학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개념적 독자성을 가질 수 없으며, 다만 그것이 실천 속에서 사유되고 논의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이황 철학은 중국과의 비교를 통해 차별화되는 독자성으로 논할 수 있으며, 그것은 나아가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받는 그 과정에서 수놓아진 사단칠정론·성정론의 독자성이라고 보아야 함을 역설했다. 중국의 사유가 性을 더 중시했다면, 조선의 사유는 情을 더 중시했다는 것이 그 일단이다.

그런가하면 다산이 퇴계를 깊이 사숙했음을 읽어내는 논문도 최근 발표되었다. 유권종 중앙대 교수는 퇴계학부산연구원에서 펴내는 ‘퇴계학논총’ 10·11호에서 ‘退溪와 茶山의 禮說 比較’를 발표했다. 유 교수는 우선 “퇴계와 다산을 성리학과 실학이라는 분리된 전통에서만 보는 것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 두 학자는 “올바른 예의 학습과 실천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정확한 예문의 파악과 정립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공동의 인식을 지녔다고 말한다.

퇴계학, “사변적 이론주의 성찰해야”

아울러 그는 다산이 예설의 근본적 관점을 퇴계로부터 계승되는 예학적 전통에서 구했다고 계속 강조한다. 이는 다산의 정치적 당색의 근원에 기인한 것도 있겠고, 나아가 성호를 사숙하는 과정에서 실천 가능하면서도 고례에 부합하는 예문을 정립하려는 퇴계의 예학적 태도를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게 유 교수의 판단이다. 특히 다산이 ‘주자가례’를 미완의 예서라고 보아 그 불충분성 때문에 예경을 비롯한 기타 예서를 두루 참작하였던 것도 퇴계와 많은 유사성이 발견된다. 나아가 다산의 예설은 방례의 부면에서도, 사대부의 奉祀代數에 관해서도 퇴계를 계승하려는 의도가 뚜렷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유 교수의 해석은 여러모로 앞서 퇴계에 대한 조남호 교수의 조망과 연결되고 있다. 즉, 퇴계가 “현실에서 실행 가능한 예를 추구했고 그러한 예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정립하기 위한 노력에 적극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퇴계를 “속세를 벗어난 철학자” 정도로 간주하는 태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질타하는 듯하다.

▲최근 동양철학계에서는 성리학의 중심 개념으로 간주되어 온 것에 대한 재검토가 활발하며, 구절의 이론적 정합성을 벗어나 철학자가 던졌던 질문의 배경 및 이유를 깊이있게 음미하려는 시도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최근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학자들로 왼쪽부터 김영민 브린모어대 교수, 유권종 중앙대 교수, 조남호 평화대학원대 교수,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의 논문이 주목된다. ©교수신문

그런가 하면, 동양철학계에 계속 인식론적 각성을 촉구하는 논문을 발표해온 김영민 브린모어대 교수의 ‘理의 再定位와 心의 再定義’도 이런 맥락에서 큰 울림을 준다. 한국철학회의 ‘철학’ 제85집에 발표된 이 논문은 왕양명의 그늘에 가려 크게 주목받지 못한 明의 유학자 甘泉 湛若水(1466~1560)를 성리학의 중심축으로 재정위하고 있다.

김 교수는 담약수가 왕양명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그가 “마음(心)을 도덕가치(理) 그 자체라기보다는 도덕 가치가 존재하는 장소로서 간주”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심이 도덕 가치 그 자체가 아니라, 도덕 가치가 실현되어질 장소라면, 심은 선으로도 악으로도 열려있는 셈이다.

담약수가 왕양명의 모습을 보며 우려했던 이유는 “현실태로서의 심이 아니라 규범적인 심을 논하면 심과 성의 구분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양명의 心卽理 명제는 “지각과 규범적 표준을 동일시하는 것”인 셈이다. 이런 담약수의 비전 속에서 도덕 주체는 왕양명의 그것에 비해 도덕적으로 덜 자기충족적인 것으로 개념화되며, 따라서 보다 고통스러운 자아수양의 길이 요청된다는 부분에서 김 교수의 논의는 인상깊은 철학적 메시지로 화한다.

心學의 전통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담약수의 그런 생각은 양명학에서 앎의 핵심개념인 ‘良知’에 대한 논의에서 그 구체성을 더한다. ‘양지’를 왕양명은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담약수는 마음의 운용에 따라 퇴각할 수 있으며, 회복하려면 고통스런 노력이 따른다고 말했다. 담약수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사실 담약수의 이러한 입장은 당대의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왕양명의 心學이 詞章, 博學 등 당시 유행하던 외재적 지식의 추구 경향을 비판하려는 나머지 “마음을 절대화하고 모든 종류의 외부 세계에 대한 탐구를 소홀히 해 주관주의로 함몰”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쯤에서 김 교수는 ‘속내’(?)를 드러낸다. 그것은 중용과 실천을 중시한 담약수의 철학에서 “개인 도덕의 완성을 도학의 핵심으로 이해한다 해도,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내적 전회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 개인의 도덕이 자아에 국한된 관심이 아니라, 자아를 넘어선 저 넓은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방법일 수 있기 위해서는 개인을 개인을 넘어선 어떤 것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론이 제공되어야 하며, 도학에서는 독특한 理 개념이 그러한 이론을 제공하였다는 게 동양적 사유전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김 교수의 방식이다. 그는 “성리학적 총체성이란 다수의 부분들을 연결해서 이루어지는 어떤 것으로서의 총체성이 아니라, 하나의 개체가 전 우주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총체성”이라는 명제를 말미에 첨부하면서 글을 마친다.

퇴계학의 ‘리발’ 담론의 위상이 조정되고, 心學의 권좌에 올랐던 왕양명의 사유전통이 갖는 근본적 맹점이 재사유되는 등 요즘 동양철학계의 유연한 탈권위는 행복해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주장들이 보편적 설명력을 가질 수 있는지가 활발한 토론의 과정에서 증명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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