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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절(晩節)의 가치
만절(晩節)의 가치
  • 김병희
  • 승인 2022.08.17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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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교수로서의 이력이 쌓여갈수록 이런저런 자리에 다가갈 가능성이 높다. 스스로 자가 발전해서 대학 밖의 어떤 자리를 탐하기도 하겠지만, 외부에서 교수에게 어떤 자리를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전혀 곁눈질하지 않고 묵묵히 연구실을 지키는 교수들도 물론 많지만 대학에는 직만 걸어놓고 정치권을 비롯한 바깥의 자리를 노리는 분들도 꽤 많은 듯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연구에만 매진하기 어려운 것도 한국 교수생활의 단면이다.

자기 전공 분야의 어떤 자리라면 그래도 이해해줄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전공과 전혀 무관한 자리를 탐하기도 하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경우도 있으니, 이 경우에는 조금 더 깊이 심사숙고해야 한다. 정치권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진출한 교수들이 이용만 당하거나 일회용 컵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경우도 많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바깥 자리로 떠난 분들도 각자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서 결정한 선택이었겠지만, 한번 외도를 하면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기 어렵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장관이나 국회의원 혹은 정부 기관의 책임자로 일하신 분들이 임기를 마치고 대학으로 돌아온 다음,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외부로 눈길을 돌리는 경우를 종종 목도했다. 20~30년 동안 몸담았던 대학이건만 마치 대학 신입생처럼 적응하지 못하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밖에서 주어진 꿀단지 생각 때문에 학생 지도나 논문 작성 같은 교수로서의 일상이 가성비가 떨어지는 하찮은 일이라 생각해, 그처럼 겉도는 것은 아닌지 싶다.

캠퍼스 밖의 꿀단지가 생각날 때마다 ‘만절(晩節)’이란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외부의 유혹을 이겨내려는 의지를 다져야 한다. 늦을 만(晩) 자에 절개 절(節) 자를 더해 만든 만절은 늦은 계절을 뜻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오래도록 지키는 절개’로 풀이하고 있다. 나이 들어서도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자신의 평소 소신을 지키며 당당하게 늙어가는 기품을 뜻한다. 국화에 만절이란 말을 더하면, 국화는 서리를 맞으며 꽃을 피운다는 뜻을 지닌 황화만절(黃花晩節)이 된다. 옛 선비들이 늙어서도 고상한 절조를 지킨다는 의미로 자주 썼던 표현이다.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외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해오던 일을 소중히 여기며 연구실을 지키는 일은 정말로 중요하다. 흔들릴 때마다 만절이란 말을 가슴 속에 깊이 새긴다면 마음을 좀 더 굳건하게 다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앞에서 말한 만절과 뜻은 다르지만 같은 음으로 시작하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말도 있다. 『순자(筍子)』의 ‘유좌 편’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의 황하(黃河)는 굽이가 많기 때문에 강물이 만 번을 굽이칠 수 있지만 결국에는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심지가 굳은 사람은 자신의 뜻을 반드시 관철시킨다는 뜻으로 주로 쓰였지만, 때로는 충신의 절개를 꺾을 수 없음을 비유할 때도 쓰였던 말이다.

우리는 세속의 유혹에 한없이 약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출세의 기회가 왔을 때 단번에 내치지 못할 만큼 현실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어떤 교수가 다른 교수에게 세속의 유혹을 단호히 봉쇄하고 옛 선비처럼 살라며 강권할 수는 없다. 외도하는 교수들을 함부로 평가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인간의 몫이 아닌 신께서 하실 일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한 자리 차지한 교수보다 평교수로서 정년을 맞이하는 경우가 훨씬 행복한 인생이라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인생의 늦은 계절에 이르기까지 여기저기 한눈팔지 않고 평교수로서 자신의 전문성을 가꾸며 정년을 맞이하기. 바로 그 순간에, 서리를 맞으며 꽃을 피우는 국화처럼 ‘만절의 가치’도 피어날 것이다.

김병희 편집기획위원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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