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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斷으로 돌아오라 … ‘말반죽’이 비평인가
判斷으로 돌아오라 … ‘말반죽’이 비평인가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2.24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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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향: ‘비평의 새로운 길’ 모색하는 평단의 표정

▲문학평론가 이명원(왼쪽)이 고백의 수사학 뒤에 안이하게 숨어있는 문학평론가 김형중에게 비판을 가했다. © 교수신문 

한국 문학사에 이런 시대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문예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서점에서 문예지를 구입하는 관행이 거의 사라진 요즘, 독자들이 피부로 느끼기엔 역부족이지만 문단 주변에서는 쏟아지는 잡지의 물량공세에 입이 벌어질 지경이고, 문단의 내로라하는 필자들은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원고청탁 때문에 거의 막노동하듯이 글을 쓰고 있다. 좋은 잡지 안 좋은 잡지를 가리지 않고 일정 조건이 되면 문화예술위원회가 자금지원을 해주기 때문인데, 외부에서 보면 저러다가 돈에 질식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고백의 은폐된 주관주의

이런 상황에서 평론 분야는 시인작가에 비해 머릿수가 적어 겹치기 출연이 자못 심각하다. 특히 주목받는 강유정·조강석 씨는 불러주는 대로 글을 쓰는 양상이어서 아쉽다. 어떤 시인은 흥에 겨워 하룻밤에 30편의 시를 썼지만, 이튿날 아침 몽땅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신예들이 작가론과 테마서평 같은 중노동에 동원되는 사이에 의미있는 문제제기들은 대개 청장년급 평론가들 사이에서 터져나왔다. 먼저 가장 주목을 끄는 글은 ‘문학수첩’ 봄호에 이명원 씨가 발표한 ‘비평: 고백과 판단’이다.

이 글은 오늘날 ‘고백’과 ‘판단’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비평에 명확한 방향제시를 해주자는 의도를 품고 있다. “고백은 판단을 봉쇄하는 글쓰기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관적 판단을 독자들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비평가는 강요된 고백의 이면에 있는, 고백자의 은폐된 판단의 주관성을 드러내고자 한다”라는 그는 평론가 김형중을 비판대상으로 삼아 글을 풀고 있다.

‘문예중앙’의 편집동인이며, 기본적으로 ‘문학과사회’의 세련된 이론비평의 계파에 속하는 김형중 씨는 얼마 전 ‘문예중앙’ 2005년 겨울호에 ‘기어라 비평’이라는 명령조의 글을 발표했다. 그렇잖아도 기고 있는 비평에게 더욱 기어다니라는 이 표현은 평론가란 모름지기 작품 옆에서 작품을 껴안고 뒹굴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명원은 ‘현상추수론’으로 일축한다.

왜 그런지는 ‘기어라 비평’이라는 글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에서 나타난다. 김형중은 이 글에서 알튀세르와 푸코, 프로이트와 데리다,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장식적으로 나열하고 있을 뿐 자신의 사유는 한톨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감각과 사유의 확실성”을 믿고, 그것을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하니 평자가 황당해할 수밖에 없는 것. 그에 대해 이명원은 아래와 같은 말을 들려준다.

“사유란 데카르트적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오직 자신의 오감과 사유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신이 없다면, 나 데카르트는 신에 대해 왜 그토록 끈질기게 상상하는 걸까. 신에 대한 믿음 없이도 나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상상하곤 한다. 과연 왜 그런 걸까. 이런 방법적 물음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것이 ‘방법서설’이다. 이러한 사유는 김형중의 “믿고 싶었다/믿을 수 없다”는 허약한 고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322쪽)

“세련된 미문, 이젠 지겨워요”

문제는 김형중이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작가만이 독자를 돌아올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권성우나 “인간 일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기로 한 한국문학은 어느샌가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문학, 다시 말하면 반지성의 문학이 되었다”는 김명인의 비평적 진단을 ‘주관주의’라며 도매금으로 넘긴다는 것이다. 평자는 이제 주관주의를 모르거나 악용하는 김형중을 계몽하고 깨우쳐야 하는 처지에서 “그의 감각이란 것은 사유가 아닌 신념이며, 더 정확하게는 신념체계(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간곡히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 평단은 현재 작품의 질과 작가의 세계관에 대한 판단을 강조하는 진영과 이론으로 학습한 인간이해, 관계, 세계상을 작품 속에서 발견하고 동감하려는 일종의 묘사주의가 맞닥뜨리고 있다.

패기에 어울리는 정교함 요구돼

이런 대립은 ‘문학과사회’가 봄호에서 뽑은 평론 부문 신인상을 보면 재확인된다. 소설가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를 분석한 ‘돈 키호테-햄릿-돌시네아-오필리어-되기’라는 제목에서 짐작가듯 작품을 ‘자아의 현상학’ 내지는 ‘주체의 구성학’으로 변환시켜서 풀어낸 글이다. 심사단은 “철학적 질문과 텍스트 해석이 잘 어우러지는 미학적인 글”이라는 평을 내렸는데, 이명원의 표현을 빌리면 “말반죽”을 아주 잘한 글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신인에 대한 기대보다 더 먼저 읽히는 것은 여기서 그동안 비판받아온 ‘문학과사회’의 미학주의적 경향이 더욱 강화된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제 그 경계가 ‘문학’을 넘어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한 철학적 에세이로까지 나가는 듯하다(참고로 당선자는 철학 전공자다).

이런 ‘문학과사회’의 모습은 최근 ‘문학동네’의 이론적 지휘관인 황종연 동국대 교수가 고은 시인의 ‘만인보’를 비판함으로써, 동시대 민중문학의 정전에 대한 수준높은 해체작업을 보여준 것과 대비된다. 이 평론으로 최근 ‘현대문학’이 수여하는 현대문학상을 받은 황 교수는 ‘보통 독자를 위한 언어와 그 통역’이라는 수상소감에서 “문학비평은 어떤 담론을 선전하고, 어떤 학파나 정파의 방언을 대변하기보다 보통 독자를 위한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줬다. 누구보다 이론의 정치함을 자랑해왔던 황 교수의 이런 말에서 이론적 비평의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묻어난다.

권성우 숙명여대 교수는 최근 ‘문학사상’ 1월호의 ‘대안적 비평문화의 정착을 위해’에서 ‘비평과전망’, ‘작가와비평’ 동인들에게 의미있는 충고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이들의 비평행위가 근본적 재조정의 시기를 맞고 있으며 “비평적 패기에 상응하는 분석의 치밀함과 정교함이 요청된다”는 것. 주류 문단의 관성화된 관행을 새로운 문학적 활력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일방적 비판, 문학권력 등의 진전되지 않는 의제설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앞의 김형중에 대한 이명원의 비판은 그 한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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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31 2006-03-03 22:48:46
세련된 미문, 이젠 부러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