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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담론논쟁] 김진석 교수에 대한 재반박
[동양담론논쟁] 김진석 교수에 대한 재반박
  • 김성환 군산대
  • 승인 2001.07.1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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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11 10:27:21
김성환/군산대·철학

김진석 교수는 필자가 그의 글에 대해 “서양적 잣대를 옹호한 것처럼 악의적으로 왜곡했다”며, 이를 사과하라고 요구해왔다. 사실 서양 전통을 비판-해체하는 작업을 꾸준히 수행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그런데 김 교수는 다른 글(‘철학의 광신적 대중화-김용옥의 경우’, ‘사회비평’ 27호)에서 이렇게 천명한 바 있다. “비판 행위의 정당성은 비판의 내용 못지 않게 비판하는 자의 자기 비판 태도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김 교수는 이 말을 스스로에게 우선 적용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부분을 전체로 확대한 오류

분명 문화권력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우리 학계의 서구 지향적 문화권력에 중독돼 있지 않은가. 동양 중심의 해석학뿐만 아니라 서양 중심의 해석학도 비판받아야 한다는 지적은 옳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서양 중심의 해석학으로 ‘동양’과 ‘동양철학’을 멋대로 재단하지 않는가. 서양적 해체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새롭게 현실을 분석하고 서술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해체’가 서양 텍스트의 틀 내에서만 작동 가능한 것이라고 여기며, 동양사상과 해체론의 조우 자체를 부인하는 또 다른 서구적 ‘해체’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김 교수가 학문의 서구적 패권과 문화권력을 유지하려는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고, 그의 글에 ‘서구가 곧 보편의 잣대라는 독단’이 근원적으로 관철된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동양에 대해 ‘서양식’으로 아무 비판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비약할 필요는 없다. 진지하고 공정하며 설득력 있다면, 서양적 관점 혹은 다른 어떤 관점에서라도 ‘동양’을 비판하지 못할 이유란 없다. 그렇지만 ‘동양담론의 공허함’에서와 같이 전공 학계의 다양한 논의들에 대한 초보적 검토조차 생략한 채, 동양담론 전체가 ‘요란한 소리만 내는 깡통’이라고 매도하는 식의 선동적 독설마저 용인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김 교수 자신의 말처럼 “진득하고 고독한 작업을 외면하고 요란한 문제 제기와 대중용 지식 전시에 중독”되어 그 자체를 학문적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전공 분야에서 진지한 토론과 논쟁을 포기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김 교수와 전적으로 견해를 달리하지 않는다. 요컨대 동·서양을 막론한 철학적 해석작업에서 구체성과 실천성이 결여된 ‘추상적 관념성’이 비판돼야 한다는 것, 과거의 텍스트-경전에 대한 신성불가침의 신화가 폐기돼야 한다는 것, 인문학에 있어 과거 연구와 현재/미래 연구의 시대적 맥락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에서 필자는 그와 생각을 같이한다. 어찌 필자뿐이랴. 적지 않은 동양철학 전공자들이 이미 이런 생각을 공유해 왔다. 그러니 한국의 모든 동양철학자가 동양철학의 추상화와 경전의 신화화에 매달린다거나 시대착오적이라는 등의 무책임한 비난은 그만 자제해야 하지 않겠는가. 일방적 매도가 아닌 상대가 있는 토론과 논쟁을 바란다면 말이다.

이제 필자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고 김 교수가 지적한 문제를 다루겠다. 그는 노자를 해체론과 연관짓고 도가사상을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한다. 무엇보다 이것은 해체론이 서구적 텍스트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이며, ‘해체’가 서양 후기근대의 역사적 맥락에서만 발생 가능한 사건이라는 인식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탈현대적 해체론은 오히려 역사가 체계의 논리성 안으로 환원될 수 있는 가능성을, 혹은 역사를 체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부한다. 그런데도 ‘해체’가 일정한 역사적 흐름의 어떤 시점에서만 가능한 사건이라고 단정짓는다면, 이야말로 해체론적 작업의 의의를 결정적으로 까먹는 것이다.

독불장군 격의 해석학에 불과

노자가 해체의 ‘대상’ 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노자의 ‘무위’는 비열한 지배술과 우민정치의 음모에 불과하다. ‘자연’ 역시 백성을 어리석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는 노회한 통치 방법일 뿐이다.” 그런데 이는 명백히 잘못된 해석으로, 노자를 ‘해체’한다기보다 강제로 철거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노자 해석에 동의할 전문가는 거의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제 그들 모두를 다시 ‘추상적 관념성’의 노예로 매도하고 말 것인가. (이 문제는 별도의 지면을 통해 다룰 예정이다.) 김 교수는 또한 노자의 자연을 말하는 사람들이 서양 문명의 위기를 기술에서만 찾는다고 힐난한다. 그러나 이미 다른 논문에서 도가의 사상을 논의하며, 문명의 위기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계와 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서 기인한다고 밝힌 바 있는 필자는 이를 수긍할 수 없다. 학계의 기존 연구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는 이런 독불장군격의 해석학이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해체’는 종종 파괴와 부정 자체로 평가절하 되곤 한다. 하지만 지난 것은 무조건 부수고 보는 것이 해체인가. 아니다. 김상환 서울대 교수(철학)의 말처럼 해체는 오히려 ‘옛 것을 부수어 새 것을 얻자’는 것이고, 이렇게 말할 때 해체론자는 문화대혁명의 홍위병이 아닌 지독한 문헌학자이다. 해체론은 편견 없이 동서양의 사상사적 전통을 溫故知新하는 방법을 역설하며, 그렇기에 데리다가 다시 수 천년 전 중국의 도가 사상가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해체의 ‘이념’, 동서양 공유

보다 중요한 것은 해체의 정신-이념이다. 만일 해체를 지도하는 ‘이념’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다시 김상환 교수의 말을 빌자면, 그것은 “고유한 내면성과 사유욕으로부터의 해탈, 절대적 無慾이리라.” 탈현대의 해체는 이런 ‘이념’을 공유하는 지점에서 노자·장자와 연대하며, 더 나아가 은유의 강조·差延의 해석·시비분별에 대한 관점·지배질서 해체의 전략 등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 여러 지점들을 확보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탈현대의 해체론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오래된 도가 문헌의 먼지를 털고 책장을 다시 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시대착오적 음모인가. 우리는 분명 과거 연구와 현재/미래 연구를 혼동하지 않지만,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새 것’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동·서를 부수고 형이상학을 부수며 체계 속의 역사도 허물어 더 이상 부술 것 없는 텅 빈 마당에서 데리다와 노자·장자가 만나고, 하이데거가 붓다를 만난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들이 함께 오늘의 문제와 내일의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녕 그리도 ‘잘못된 만남’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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