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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괴로움을 실존의 힘으로?…극단적 견해일 뿐
불안한 괴로움을 실존의 힘으로?…극단적 견해일 뿐
  • 이종철
  • 승인 2022.08.05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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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불안과 괴로움: 하이데거, 니체, 그리고 초기불교의 4성제』 권순홍 | 도서출판 길 | 400쪽

하이데거·니체의 철학을 불교 4성제로 평가
극단주의자·모험주의자의 반윤리성 경계해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과 유식불교를 동이점(同異點)에서 비교한 역작 <유식불교의 거울로 본 하이데거>(도서출판 길, 2008)를 냈던 군산대의 권순홍 교수가 투병 생활의 긴 공백기를 깨고 새로운 역작 <불안과 괴로움: 하이데거, 니체, 그리고 초기불교의 4성제>(도서출판 길, 2022)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존재론과 니체의 원숙한 후기 철학 그리고 초기불교의 4성제를 '불안과 괴로움'의 지평에서 하나로 엮어 해석하는 가운데 하이데거와 니체를 4성제의 진실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풀이하고 평가한다. 철학 연구자의 고된 노동에서 볼 때, 하이데거, 니체, 불교가 하나 같이 독립적이어서 그 각각을 따로 연구하기에도 힘이 드는데, 이 셋을 관류하는 괴로움의 핵심 주제를 찾아서 하이데거와 니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비판적 평가를 제시한 권 교수의 업적은 한국 철학의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발군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실존론적 죽음의 가능성과 함께 특별히 주목한 현존재의 실존론적 불안을, 일체를 괴로움으로 보는 고성제(苦聖諦) 등 초기불교의 4성제(四聖諦)와 접목해서 비판적으로 풀이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론적 불안은 단순히 심리학적이거나 정신의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기투(企投, Entwurf)와 함께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유정성(有情性, Befindlichkeit)의 구조계기, 말하자면 현존재의 존재를 시종일관 물들이는 근본 기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성제의 괴로움은 번뇌를 가진 모든 범부가 다 세간의 삶에서 겪는 문제이다. 이렇게 현존재의 실존론적 불안과 범부의 괴로움은 삶의 보편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같은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다. 현존재가 실존론적 불안을 벗어날 수 없다면, 범부는 삶의 괴로움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가르쳐주는 4성제에 따라 8정도(八正道)의 길을 걸어가면서 갈애와 무명을 제거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현존재의 존재가 불안이고 범부의 삶이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불안과 괴로움은 얼마든지 서로 연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그런 것처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불교는, 즉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존재론과 초기불교의 4성제는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사회존재론』을 쓴 경희대 하피터 교수는 권 교수를 일찍부터 하이데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길 중 '불교의 길'을 개척한 연구자로 주목한 바 있다. 

 

실존론적 불안과 4성제, 무상과 범부의 괴로움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불안과 두 얼굴’이고, 제2부는 ‘무상(無常)과 범부의 괴로움’이고, 제3부는 ‘불안과 4성제’이다. 지은이가 제1부에서 불안의 기분에 접근하고 해석하는 방법은 기존의 방법과 다르다. 그는 기존의 해석에서 그런 것처럼 불안을 본래성의 가능성을 자각하는 계기로만 보지는 않는다. 일단 현존재의 불안을 저강도(低强度)의 잠복한 불안과 고강도(高强度)의 근원적 불안으로 구분한다. 실존을 앞에 둔 잠복한 불안(latente Angst)이 본래성의 가능성을 장악하도록 저강도의 안절부절못하는 기분과 섬뜩한 기분으로 현존재를 위협하지만, 현존재는 이 불안의 저강도 위협을 피해서 일상적 공공성으로 도피한다. 그 결과 현존재는 비본래성에 빠진다. 반면에 죽음을 앞에 둔 근원적 불안(ursprṻngliche Angst)은 본래성의 가능성을 장악할 수 있도록 고강도의 안절부절못하는 기분과 섬뜩한 기분으로 현존재를 위협한다. 현존재는 이 불안의 고강도 위협 앞에서 도피하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으로 선구함으로써 비로소 본래성을 장악한다. 하지만 이 두 불안이 별개의 불안으로 분리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두 불안은 같은 불안의 두 얼굴 표정일 뿐이다.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불안 담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의 불안이 어떻게 서로 다른 표정을 지으면서 현존재의 실존 경험을 비본래성과 본래성으로 끌어가느냐에 있다. 이것은 이를테면 어떤 이에게는 고통이 단순히 고통으로 그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정신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경험으로 다가오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제2부에서 지은이는 4성제 중 고성제를 상세히 분석한다. 유위법(有爲法)의 무상성과 갈애나 무명 같은 번뇌로 인해서 범부에게 괴로움이 발생한다. 가령 즐거운 대상에 대한 유애(有愛)나 욕애(欲愛)로 인해 즐거운 느낌의 무상한 변괴(變壞)가 괴고(壞苦)의 괴로움으로 바뀐다. 괴로운 대상에 대한 무유애(無有愛)로 인해 괴로운 느낌이 고고(苦苦)의 괴로움으로 도진다.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이 느낌의 무상성에 대한 무명(無明)으로 인해 행고(行苦)로 번진다. 지은이는 3가지 괴로움 중 행고가 보편적 괴로움의 지위를 차지한다고 역설한다. 

제3부에서 지은이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불안과 4성제를 서로 대비하면서 죽음을 절대화하는 하이데거의 견해와 삶을 절대화하는 니체의 견해를 비판한다. 하이데거처럼 죽음을 절대화하는 한, 실존의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죽음이다. 내가 본래적 가능성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의 죽음이 실존의 본래적 가능성을 여과해서 나에게 건넨다. 다시 말해 죽음을 절대화한다는 것은 일상적이고 공공적인 세계에서 널리 떠다니는 가능성 중 나의 죽음이 여과해서 나에게 건네는 본래적 가능성을 선택하고 본래적 전체성의 방식에서 근원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작성하는 버킷 리스트를 생각하면 죽음의 절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본래적 가능성에 대한 죽음의 여과 작용이 많은 생명과 재산에 위해를 가하는 극단주의자나 모험주의자의 반(反)윤리성으로 치달을 수 있”(374쪽)다는 점이다. 지은이가 볼 때, “죽음으로 선구하는 가운데 불안의 괴로움을 근원적 실존의 힘으로 이용하라는 하이데거의 처방은 역시 사견(邪見)에, 결국 실존을 윤리적으로 청정하게 보살피고 보호하지 못함으로써 평화, 안정, 안식을 주지 못하는 실존에 대한 극단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375쪽) 한편 니체처럼 삶을 절대화할 경우, 삶에 대한 괴로움의 정당한 발언권을 무시하면서 삶에 대한 극단적 견해에 빠지게 된다. 말하자면 니체가 “질병에 대한 바른 진단, 질병의 원인에 대한 바른 분석 및 질병의 근치(根治)를 등한시한 채 건강한 삶을 절대적으로 과신하는 것은 사견에, 도리어 삶의 건강을 파괴함으로써 평화, 평온, 안식을 주지 못하는 삶에 대한 극단적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373쪽). 제3부가 이 책의 백미이지만, 제3부 중 제12장과 제13장이 백미 중의 백미이다. 이 두 장에서 하이데거와 니체에 대한 불교적 비판에 이르게 된 논의 과정과 그 비판의 정당성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한국 철학계에는 외국의 철학 이론과 사상을 번역하거나 단순히 소개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국내 학자들의 빼어난 연구서들이 줄을 잇고 있다. 권 교수의 책은 그런 대열에서 한국 철학의 미래를 선구적으로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리라 믿는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수난을 받는 시대에 이처럼 고귀한 출생이 정당하게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눈 밝은 이들이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이종철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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