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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건, 한국적인 것이건, 그 무엇이건
동양화건, 한국적인 것이건, 그 무엇이건
  • 이영철 계원조형대
  • 승인 2006.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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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비평_‘하산하라’ 展(비비스페이스, 2월 26일까지)

독일에 거주하는 류병학은 전문적인 글쟁이로서 한국미술판의 ‘기인’이라 할 만하다. 그는 시각 문화에 해당하는 거의 모든 매체와 장르를 종(분석)과 횡(이동)으로 가로지르며, 이미지를 보고 느끼고 해독하는 방식 자체를 실험하면서 새로운 의미 생산에 가장 선두에 있는 자다.

그는 예술가, 지식인들의 관념과 태도 안에 자리잡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우상’을 거침없이 밖으로 끄집어내어 분리수거하는 잔인한 습성을 가진 야수이기도 하다. 그만큼 전방위적으로 국내의 미술 비평가, 미술이론가들의 많은 글을 독파해 가며, 그것을 효율적으로 재사용, 재맥락화하고 비판적 코멘트를 붙이는 부지런한 글쟁이가 아직 없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 전시를 한 곳은 대전의 ‘비비스페이스’라는 곳으로, 전시의 제목은 ‘하산하라!’이다. 선언적 명령어가 옷깃을 잡아끈다. 교수신문은 이 기획전을 당대 미술흐름에서 어떻게 읽어야하는가를 질문했다. 글쎄 그것은 너무 큰 질문이긴 하다.

다만 작품들에 대한 의미론적 읽기보다는 ‘영혼의 질감’을 찾는 독자들에게 이 전시는 우리 내부의 감각적 가능성의 세계, 그것은 열락의 세계일 수도, 지옥일 수도 있을, 동굴속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그러나 별 생각없는 일반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예쁘고 장식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외국인 입장에선 이 전시가 무언가 강렬하고 다소 주술적인 ‘한국미의 원형’같은 것을 탐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테고, 내국인 눈에는 다양한 표현매체와 그것들 간의 접합을 통해 소위 한국적이라 말해지는 것을 밀도있게 요약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여기 초대된 작가들 작품만으로 판단하자면 모두 자신의 ‘스타일’을 창안해낸 강한 연구자들처럼 보인다. 고유한 스타일이 없는 작가는 아직 자기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을 초청해 류병학은 어떤 화설 혹은 요설을 만들어내는 걸까. “그림 안으로 하산해”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안으로 완전히 내려가게 되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그곳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虛의 세계일까. 감각의 끝 지점은 무얼까. 관객은 세계와 자신의 살아 움직이는 경계인 피부에서부터 주름을 따라 더 깊은 안, 안보다 더 안으로 들어가다 무한공간으로 열리는 문턱을 만나게 되고, 그 여행은 태어남과 죽음, 선과 악, 짐승과 초인이 연결된 어둠 속에 걸려진 끈(string)이다. 이런 세계를 류병학은 고전에서 찾아낸 ‘전우치’라는 판타지 소설을 토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우치는 낭자의 손을 잡고 따라 나온다. 그의 얼굴은 화사했고 낭자도 만족한 표정이었다. 낭자는 사랑스런 눈빛으로 우치를 바라보면서 빨강 앵두같은 입술을 열었다.

하산하라!

우치는 우리의 기억에 전우치전으로, 흔히 홍길동전을 흉내냈다고 알려진 道術 소설이다. 그런데 류병학은 일종의 전우치전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들어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고지식하고 평범한 우치는 어느날 젊은 여자 도사를 만났고, 그녀를 쫓아 옥련봉의 동굴(침실)로 들어가 천부경 숫자인 81일 동안 낭자와 ‘우주적 결합’을 나눈 뒤에 하산하여 정치판에 똥침을 놓고 훨씬 좋은 그림도 그리게 된다는 섹스판타지 소설이다. 류병학은 이 전시에서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한계가 있는 남녀간 사랑, 우주, 자연, 세속의 드라마들을 좀 더 대중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게 하는 다소 야시시한 예술 영화 한편을 구상한 것처럼 보인다.

▲<작품1> 김홍주 作, 무제,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140x140cm, 2005 ©

한국성을 표현하는 작품들에 대한 설명과 해석, 비평에서 징그럽게 듣게 되는 식상한 표현들, 가령 ‘우리 심성’이니 ‘고유의 아름다움’이니 ‘근원적 형상성’이니 ‘정통성’이니 ‘주체성’이니 ‘한국적 전통과 정신’이니 ‘정신의 歸依’니 ‘독자적인 우리 미술의 뿌리’니 ‘선비(문인)사상의 수묵정신’이니 하는, 비대상적 수사들에 대해 류병학은 동굴에서 나온 우치처럼 똥침을 놓는다. 몸이 없는 미술, 몸이 없는 표현들의 빈약함과 거짓 감각을 비웃으며 그는 갑옷의 틈 속으로 파고들어 웃음을 만들어낸다.

전시장 정면에는 김홍주의 징그럽게 관능적인 그림이 걸려 있다.(<작품1>) 글쓰기를 성적인 쾌락에 비유하며 일상의 신화학을 만들어낸 바르트처럼 김홍주는 한국회화에서 바르트 같은 존재에 비유할만하다. 남성은 분석으로 즐기고 여성은 그 즉시 감응하게 되는 그런 그림. 김홍주의 캔버스는 다층적인 감각의 집적으로서, 그것들은 신경줄, 즉 짐승과 초인을 이어주는 차이의 끈들이 집적해서 이뤄내는 감각필드다. 이 필드에는 어떤 상징체계도 개입할 틈이 없으며, 좌/우, 상/하, 겉/속, 선/악, 현실/비현실의 구분이 사라진다. 우리는 영혼의 질감이라 할 만한 사건적 영토를 슬며시 밟게되는 은총의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 문범의 회화 이미지는 그에 못지않게 환각적이며, 선악을 넘어선 ‘미의 정토’ 혹은 마법 세계로 보인다. 비인간, 비개성의 풍경, 무서운 몽유도원경. 야나기는 ‘미의 법문’에서 ‘凡夫成佛’의 이치를 깨닫는 자에게 길이 터진다고 말한다.

이종상은 상징체계에 사로잡혀있던 고대 한국의 전통 지리와 역사와 서사에 대한 이미지와 해석된 내용을 그림으로 재상징화하거나 변형하기 위해 ‘정진’해온 작가다, 오히려 그 점이 사고의 중력 법칙, 원형성과 기원을 찾아 맴도는 정체성에 대한 자의적인 디자인(disegno의 의미)이 된다. 제작의 표면효과는 있되, 예고된 필연성이 우연을 지배하는 공간의 행정화가 이뤄진다.(<그림2>)

▲<그림2> 이종상 作, '源形象-順命', 장판화, 130*120cm, 2005 ©
여기서 정진(fast)은 또한 굶기와 의미가 동일한 단어다. 굶기는 어둠의 세계에서 정신의 소용돌이(木)를 만들어내는 급진적인 방식이다. 그것은 전달(교육이나 계몽)보다는 먼저 저항의 정신이다. 폴 오스터의 초기 산문집, ‘굶기의 예술’에서, 그는 굶기를 통해 추락하는 범부의 세계 속에 우연, 우발, 사건이 열린다고 한다. 실존의 위기를 겪으며 사는 예술가들의 위태로운 정신적 삶과 그 파토스로부터 그림 그리기를 멀찌감치 떼어 놓는, 동양화에 대한 비평가들의 시끄러운 요설들을 씻어내야 한다.

 

▲<그림3> 박윤영 作, 몽유생리도(부분), 생리대 위에 먹, 350x1400cm, 2004 ©

여기서 동양화를 전혀 새롭게, 아니 오리지널하게 접근하고 있는 박윤영(<그림3>)에게 하나의 비전을 본다. 이종상이 정해진 중심에서 존재의 지도를 반복해 그린다면, 박윤영은 예측할 수 없는 생성의 지도제작법을 만들어낸다. 류병학이 자신의 책에서 인터뷰 형식을 빌어 파헤치려는 그녀의 예측할 수 없는 무궁한 사유 공간은 원래가 동양화가 추구해온 현실/가상 세계의 리얼한 서사 공간으로 표현된다. 지식도 행정도 권력도 모르며 그에 대해 관심조차 없는 어린 작가들 가운데 이미 성숙한 정신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결코 전통을 부인하는 법이 없으며 역사적 부채감 없이 그것을 마법의 도구 상자로 이용해 무언가를 새롭게 발명해낸다. 그들은 의도하지 않고서 도래할 세상을 열며, 교육을 벗어나는 순간 독학자가 되어 세계를 연다.

유승호는 새로운 視聽방식의 그림을 그린다. 그의 도움으로 우리는 눈으로 ‘듣는다’. 의성어와 의태어의 미세한 단어들이 핵분열을 일으키듯 절대적 분산, 패치워크, 그리고 완전히 반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전통 산수의 그림으로 됐다가 오줌누는 아이도 됐다가 뭐든 된다. 창작자의 삶은 그 자신에게조차 어느 정도 비의에 싸여 있게 마련이다. 전통이나 정체성은 비의에 싸여진 세계를 주파하는 예술가에게 안내지도의 역할을 하지만, 삶을 관통하는 자기 분열의 기쁨/고난을 통과하지 못하면 한갓 종이 부적이 되고 말 것이다. 창작은 그래서 위험한 행위다. 하지만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영철 / 계원조형예대·미술평론가

필자는 일리노이대에서 ‘20세기 미술비평’을 전공했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전 등을 감독했고,  ‘현대미술지형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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