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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착오적 아방가르드의 역설
시대착오적 아방가르드의 역설
  • 허명진 무용평론가
  • 승인 2006.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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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비평: 얀 파르브의 '눈물의 역사'(예술의 전당, 2월10~12일)

오늘날 유럽 공연예술계에서 ‘벨기에 춤의 물결’은 이미 하나의 현상이다. 장르를 넘나드는 과감한 실험정신, ‘몸’의 메커니즘으로 육박해오는 무대, 영상이나 설치미술을 무대로 확장시킨 현란한 ‘비주얼’ 등이 복합적으로 일으키는 춤의 폭풍에 전 유럽이 놀래버린 것이다. 이러한 벨기에 춤의 ‘기습’을 진두지휘한 삼인방 가운데 지난 2월 10~12일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가진 얀 파브르는 가장 먼저 돌출했던 ‘앙팡 테리블’이다. 한국에 일찌감치 소개된 다른 후속주자들인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 빔 반데키부스에 비해 가장 늦게 내한공연을 가진 셈이다.

이번에 공연된 ‘눈물의 역사’에서도 드러났듯이, 얀 파브르는 아방가르드 체질이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에 시달려오다가 1830년 겨우 독립국이 된 벨기에는 ‘전통의 부재’에 맞닥뜨려 문화정책의 과감한 선택과 집중을 시도한다. 곧 1970년대부터 몸 연극의 경향, 퍼포먼스 등 광범위한 아방가르드 실험으로 직행한 것이다. 그 두터운 저변에서 뾰족이 솟아 나온 빙산의 일각이 말하자면 얀 파브르 같은 이들이다.

물론 무용의 경우 발레를 수입해 자국화 하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70~80년대에 걸친 짧지 않은 전통의 독재는 젊은 안무가들로 하여금 오히려 인접장르에서 성행하는 아방가르드의 성장호르몬을 자연스레 흡수하게 한다. 따라서 지난 10년 새 성취된 벨기에 춤의 압축성장은 전통 따라잡기보다 당대를 호흡하는 젊은 예술의 추구에 주력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르의 통합과 가로지르기에서 분출하는 벨기에산 에너지가 늙은 유럽에 젊은 피를 수혈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진보’라는 개념이 생명을 다한 것으로 보이는 오늘날 아방가르드는 시대착오적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얀 파브르 같은 아방가르드가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단지 권태로운 유럽이 굳어버리기 직전에 휘저어줄 활력이 필요했기에 벨기에가 주목을 받는 것일까.

원근법을 찢는 청각의 충격

얀 파브르의 ‘눈물의 역사’는 시대착오적인 광인들이 등장한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그들의 무모함에서 역설적으로 어떤 가능성을 포착하겠다는 얘기다. 극을 주도하는 인물 중 하나인 ‘절망의 기사’는 돈키호테처럼 터무니없이 진지하다. 그의 장광설은 당혹스럽지만, 이미 강요할 수 없음을 아는 수사학이다. 조롱거리가 될 줄을 알면서도 꿋꿋하게 ‘울고 있는 육체’를 통한 영혼의 구원이라는 중세적 기획을 읊조리는 것이다. 이 공연은 이미 실패의 눈물을 예감하면서도 감행하는 자를 닮았다.

한편, 중세를 통한 르네상스의 치유를 믿는 기사와 끝없이 길항하는 자는 디오게네스를 상징하는 ‘개’이다. 그는 아예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자체를 냉소하면서, 대낮에 등불을 켜들고 “나는 사람을 찾고 있소. 사람은 어디 있소?”라고 일갈한다. 그는 때로는 광야의 선지자처럼, 때로는 헤비메탈 가수처럼, 거침없이 독설을 뱉어내며 서구 문명에 죽비를 내리친다. 실제로 침, 오줌, 정액 등을 내지르는 행위를 통해 온몸으로 권위에 대한 경멸과 조소를 실천하며 살았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그대로 이 공연자체와 같다.

진지함과 냉소가 충돌하는 이들의 화법은 문명 비판의 변증법을 빚는 것 같다. 하나는 전인적 인간대신 액체를 방출하는 근원적인 몸을 들이대고, 다른 하나는 모두에게 “유죄”라고 외치듯 문명은 원죄임을 선고한다. 이러한 양가적 밀고 당기기는 작품에 작용하는 ‘게임의 규칙’ 같다. 이런 식의 문명 비판은 감각적으로도 확대된다.

원근법의 시각적 소유를 발명한 르네상스를 나무라듯이, 이 공연은 자주 청각적 충격을 가한다. 천둥소리나 북소리, 눈물이나 땀인 듯 영롱하게 깔린 유리 공예를 두드리는 소리, 소라껍질 오브제의 침묵 등. 공연 첫머리에 15분간 계속되는 째지는 듯한 울음소리는 조화로운 하프선율이나 성악으로 달래지기도 한다. 이러한 감각의 복합적 층위에 신화나 단편적 에피소드 혹은 행위들이 삽입되면서, 시각적 위협은 가중된다. 말 그대로 눈뜨고도 다 못 보는 공연이 되는 것이다. 특정 감각과 기능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오만이다. 초반부 울음 우는 영아 살해와 더불어 아폴론에게 도발했던 니오베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저 높은 곳의 ‘바위’ 여인은 그래서 회한의 눈물을 쉼 없이 짜낸다.

신화에서부터 고대, 중세,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억의 고고학적 풍경이 들추는 것은 ‘울고 있는 육체’이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근원적인 몸은 여하한 가치체계에서 벗어난 몸의 ‘영도’이다. 배설하는 몸은 어디에나 있다. 단지 숨겨져 있을 뿐. 그것은 심미적인 몸도, 은밀한 욕망의 대상이 되는 몸도 아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지극히 평범한 몸이다.

그것의 노출을 변태로 취급하는 것은 문명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예술을 빙자하거나, 카니발 식의 질펀한 제의를 거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덮개를 제거한 땀 흘리는 몸은 어느 순간 마치 예술작품처럼 보란 듯이 전시된다. 유리 공예 오브제를 몸의 틈새에 끼우거나 그 위로 눕기도 하면서, 몸은 설치와 행위의 결합 속에 낯선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한편, 장면의 갈피마다 북소리에 손발을 맞추며 깨어나는 집단 무의식은 제의를 예고한다.

결국 무대는 제의의 카오스적 에너지를 맞이한다. 인간의 오만에 몸과 대지가 메말랐고 두려움과 절망이 거듭 엄습해오지만, 그럴수록 촉촉함에 대한 절실함은 더해간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 내놓을 밖에. 금기를 걷어낸 살이 흔들리고 체액이 분비될 밖에. 아무리 말이 만연하고 산뜻한 이미지가 범람한다 해도, 그럴수록 끈적이고 혼탁하지만 정직한 몸의 진실만이 최후의 보루로 남는지 모른다. 이후에 뿌렸을 지도 모르는 비는 간절히 기구하는 인간을 측은히 굽어보는 하늘의 눈물일 것이다. 마지막의 메시지에 함부로 코웃음 칠 수 없는 것은 터무니없는 진지함이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이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의 지층이 두께로써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절망에 빠질 수는 없다 

확실히 얀 파브르의 ‘눈물의 역사’에는 시대착오적인 면이 있다. ‘우리의 영혼을 구하소서(Save Our Souls)’라고 마지막에 메시지를 새겨 넣는 총체극적인 발상은 언뜻 모리스 베자르의 낡은 방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벨기에 무용계를 장기간 지배했던 이 현대발레의 거장의 영향력은 아무래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대중 추수주의로 흐른 베자르와 달리, 얀 파브르의 ‘토털 아트’ 방식은 아방가르드의 예리한 각을 곧추세운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적 낙관을 믿었던 과거의 아방가르드와도 사뭇 다르다.

얀 파브르의 방식은 이미 지나온 역사를 되새기며 다가올 미래의 파국을 예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항을 포기할 수 없는, 여전히 저항할 수밖에 없는 자의 눈물을 머금고 있다. 물론 저항이 당장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은 아님을 이미 알고 있다. 절망이 깊지만 패배주의로 흐를 수는 없다. 덧없는 장밋빛 미래를 바라보는 대신 과거로 고개를 돌린다면, 오히려 형해화되어 펼쳐진 역사의 잔해로부터 한 가닥 희망이나마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기든 지배계급에 이용당할 위험이 있고, 끝없이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것이 바로 ‘눈물의 역사’를 쓰는 이유가 아닐까.

어쩌면 서구의 문명이 극치에 달했기 때문에 이러한 아방가르드가 오히려 가능하게 비친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요청된 것이다. 영원히 주류일 수 없는 얀 파브르의 무대가 미적 쾌적함을 기대하는 주류계층에 던지는 불편한 장광설이나 영문모를 호통, 창조적 불화의 퍼포먼스는 견디지 못한다면 가히 투덜댈 만하다. 그러한 불편함은 충분히 이유 있다.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할수록 심화되는 문명의 각질화에 대한 처방전인 셈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본다면 이 작품은 광기나 몸의 혹사, 무조건적인 반항이 전부인 초기 아방가르드의 형태와 다르지 않게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 될 것이라는 순진한 의기양양함은 더 이상 없다. 대신 얀 파브르의 작품은 신화와 역사를 들쑤시며, 억류된 무수한 눈물과 끝없는 저항을 돌이켜보라고 한다. 이미 패배할 줄 알고 감행하는 전투인 것이다. 그래서 슬프지만 여전히 뻔뻔스러울 수 있다. 시간의 층위를 거느리며 얻은 설득력이다. 이런 것이 바로 오늘날 아방가르드의 눈물 젖은 존재 양식이며 의미일 것이다.

 

그들과 같은 축적의 지혜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없지 않다. 어느 사회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진보에 대한 고민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사회는 아직 각질화를 걱정하기엔 이를 정도로 역동적이라, 이런 공연이 서구 사회에서 갖는 만큼의 의미를 충분히 이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비해 우리의 공연들은 너무 파장이 없다는 점은 되돌아보아야 할 지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당대와 만나느냐이다. 얀 파브르의 공연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나름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해답을 찾아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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