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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비평_(2)사회학자 문필가 송호근
문체비평_(2)사회학자 문필가 송호근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6.02.18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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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부족한 정서의 향연…진실에서 構動된 글쓰기를

눈을 부라리고 머리는 고흐의 나무처럼 말려 올라간 일러스트의 주인공은 촌철살인의 화두를 던지는 송호근 서울대 교수다. 그는 국내외 주목받는 사회학자로 지난 10년 자리를 매김하면서 주요 언론의 시론을 꾸준히 집필해오고 있는 우리시대 대표적 교수 문필가다.

그에게 이 말이 어울리는 이유는 문학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인용 때문이다. 송 교수는 노동사회학자이지만 적어도 조선조 사상과 문예전통, 현대 한국문학에 대한 섭렵에서 웬만한 인문학 교수 못지않은 듯하다. 게다가 서양 사상문예사의 고전들을 질서있게 열람하였다는 증거들이 글에서 속출한다. 이런 인문학적 교양과 사회학적 관점, 구조분석 등이 만나 빚어지는 언어의 풍경은 예사롭지 않다. 이런 고급 문장으로 그는 1996년 경향신문을 출발해 한국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거쳐 현재에는 중앙일보에서 1년 넘게 고정필진으로 필명을 떨치고 있다.

사회학은 닥치는 대로 시야에 끌어넣는 잡식성 학문이다. 송 교수가 칼럼에서 다루는 주제도 만만치 않은 廣幅. 노동, 의료, 기업, 복지, 세계화, 사회운동, 성장구조 등 전공주제를 포함해 문학, 예술, 과학 등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폭넓게 운신하는 그의 글은 분명 전공에 묻혀 사는 학자보다는 ‘인텔렉추얼’의 본의에 매우 근접한 지식인의 이미지를 뿜어낸다. 여기에 서울대에서 하바드대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는 그의 글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약속한다.

송 교수의 글이 여타 학자들의 칼럼과 구별되는 자기색은 ‘정서 우위’라는 점이다. 문학과의 친화력, 한림대 교수시절 정착한 강원도 농촌에서 동 대표까지 지낸 이력이 말해주듯 이웃과의 친분, 사회학자로서의 현장탐방 등은 그의 글에 스미고 스며 어떤 이론의 연역적 힘도 버텨주는 골조를 이루고 있다. 사실 개똥철학에서 잔뼈가 굵은 생활인에게 밀리는 학자들은 체험의 구체성이 곧 자신감의 기반이 된다.

이 때문인지 송 교수의 글은 선동적으로 여겨질 만큼 강렬한 어휘, 과장된 문법이 어우러져 氣運生動하고 정신없이 몰아치기도 한다. 양비론의 보신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지식인의 의도가 읽힌다. 이런 스타일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열광하는 이가 더 많다. 이런 양 갈래의 독자반응 속에서 사안을 파악하고 본질을 돌파하는 지난 10년간의 송 교수 칼럼 기조는 분명 일관적이었다고 평가된다. 그것은 바로 ‘비판과 주문’의 글쓰기다.

하지만 계속되는 송 교수의 비판, 꼬집기, 훈계하기를 듣다보면 식상한 느낌도 없지 않다. 최근 문제가 된 ‘PD 가운을 입다’라는 그의 칼럼은 황우석 연구를 검증하겠다고 나선 ‘PD수첩’을 천둥벌거숭이 취급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요즘 가면 갈수록 송 교수의 칼럼은 이름을 가리면 ‘社說’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거대언론의 이슈파이팅을 지원하는 양상을 보여 아쉽다.

그런가 하면 칼럼 목적에 맞게 발굴한 듯한 전거의 편향적 인용에 대한 말썽도 잦다. 최근 인터넷신문 서프라이즈에서는 송 교수의 ‘도덕만으로는 배가 고프다’라는 칼럼이 성토되었다. ‘먹물의 가면’이란 아이디의 칼럼니스트는 송 교수가 사실왜곡, 교묘한 기득권 옹호, 비논리적 글쓰기, 천박한 감정 등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애초 송 교수 주장의 핵심은 현 정부가 도덕정치로 기득권의 권위를 허물고, 말도 안 되는 국책사업으로 혼란을 초래하고 세금폭리를 취함으로써 서민을 배고프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 ‘동막골’을 인용하며 “뭐를 마이 메기는” 게 리더십의 기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시공산제’로 그려진 동막골과 한국사회를 직설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놀랍다에서 시작해, 참여정부가 도대체 어디가 도덕적이냐는 등의 비판이 가해졌다. ‘도덕만으론 배고프다’라는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노골적으로 정부를 공격해 광고 효과를 노린 글이었는데, 그물을 허술하게 짰다가 호되게 당한 셈이다.

사실 송 교수의 칼럼에는 무시하지 못할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의 글쓰기의 기본적 성격과 특성을 스케치하는 것을 넘어서 구체적인 문체를 분석함으로써 송호근이라는 문필가를 내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그 스타일에서 근원적 모순점이 눈에 들어온다. 송 교수의 칼럼에는 ‘유머’가 없다. 유머란 남을 편하게 해주고 웃겨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유머는 타자에 대한 완벽한 비교우위에서 발생하는 담화의 방식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송 교수의 칼럼을 한번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높은 곳에서 한국 사회를 내려다보고 있는 지를 한눈에 알 수 있다. 한말 조선에 대해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이런 나라”(‘난파선의 사기꾼들’)라고 하는 등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이 대표적이고, “대통령은 때로는 외로워질 줄 알아야 한다”(‘정치를 바꾸자’)는 등의 훈계조의 말이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노땅’의 방식이자 ‘영감님’ 레토릭인 것이다. 심지어 “한국이 여타 국가에 비해 내놓을 게 있다면 빈곤정신과 투지 정도”라고까지 말한다. 이 정도로 내려다볼 거라면 독자를 한번쯤 웃겨줄 만하건만, 송 교수는 비판과 주문에 열중하느라 여가가 없다.

그의 또 다른 특기는 ‘복화술’이다. 많은 칼럼에서 송 교수는 “치솟는 집값으로 허탈해진 중산층, 실의에 빠진 교사, 분노한 의사”의 대변자이다. 이는 대개 학자로서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걸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은 대중의 몸을 빌어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혹은 자신의 생각임에도 그게 마치 민심인양 보편화한다. 이 복화술은 글 읽기를 매우 불편하게 한다. 한 두번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교수로서, 학자로서, 지식인으로서의 심리만 표출하는 것이 설득에 유리하지 않을까.

형태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밀집된 대도시의 인상을 준다. 가령 도올 김용옥의 글은 ‘장강의 물결’이다. 비록 그 水質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한번 거기 실리면 독자들은 원래 있던 자리를 훌쩍 이탈해 전혀 다른 공간에 서게 된다.

▲송호근 교수의 저서들. ©

송 교수의 글은 짧은 지면에 다양한 정보의 밀집도를 높인 전형적인 지식인 대상의 글쓰기다. 서론-본론-결론의 구조가 아니라,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연극적 전개 속에서 최소 5~6개의 정황과 역사지식, 에피소드가 곁들여진다. 원고지 10매 안에서 이것들은 틈 없이 꽉 짜여진다. 어떻게 보면 서비스 정신이 돋보인다. 그런데 정보를 밀어 넣고 끌어 쓰다 보면 문맥을 조정할 상황이 발생한다. 이 처리를 매끈하게 하지 못하면 칼럼의 미덕 중의 하나인 ‘一字’로 뻗어나가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송 교수의 칼럼을 읽을 때 불만은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면서 의미가 증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확한 단어와 비유, 문법, 지식에도 불구하고 왜 탄력이 붙지 않는 것일까. 최근의 칼럼 ‘다시 참호로 돌아갈 영화계’에서 어김없이 이 현상이 관찰된다.

글의 목적은 정부의 스크린쿼터 포기에 대한 비판이다. 도입부에서 ‘칸다하르’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등 아랍권 영화를 거론하며 “이 영화들은 관타나모 기지에서 행해지는 ‘정의의 폭력’을 고발하는 사진보다 더 도발적이다”, “모래바람으로 희미해진 화면에 희미한 사람들이 점멸하는 이 영화가 없었다면 아프가니스탄의 해체된 삶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그리고 본론으로 넘어가서 이런 삶의 풍경으로 점등되지 못하고 가벼워진 한국영화의 최근 동향을 가볍게 나무란다. 임권택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며 헝그리 정신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얘기가 문화는 교역의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바로 이어져 당혹감을 준다. 이어 “FTA가 아무리 급박해도 영화를 선뜻 공물로 내놓는 현 정부의 이 경박한 변신은 뜻밖”이라며 정치공학적 해석을 내놓는다. 우선 ‘배고프면 못산다’고 주장한 앞번의 칼럼과 정면 배치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하지만 더 큰 아쉬움은 문화토양을 고민하는 학자가 쓴 이 글에서 정책을 아무리 화려하게 펼쳐도, 예술과 학문의 권위가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학예진흥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은 살펴볼 수 없다는 점이다. 또한 스크린 쿼터제에 대한 뭔가 남다른 시각도 없다. 정부에 대한 비판은 의례적인 것일 수 있고, 생리화된 감각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면 이 글에서 가장 확실한 진실은 한국영화의 현실에 대한 그의 불만이다.

여기서 글이 필자 내면의 진실에 기초해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송 교수의 글에서 일관된 호흡을 앗아가는 것은 진실을 보는 시각의 부족과 그것을 합리화하고 보충하기 위한 고급정보들의 나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형용사의 사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예리한 통증’, ‘뼈아픈 교훈’ 등의 과장법을 매우 즐겨 사용한다. 지난번 글에선가는 “지금은 혁명상황, 진짜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아니 그것은 혁명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사이렌까지 울렸다. 송 교수의 이런 표현은 문제정국에 대한 묘사, 발언을 위한 윤리적 토대를 확보하기 위한 장치, 사회과학적 관찰의 ‘날카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즐겨 쓰인다. 여기까진 이해해도 ‘그만하라’, ‘고쳐라’, ‘결단하라’ 등의 주문이 칼럼 때마나 나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주문형 글쓰기는 독자들에게 “진짜 변화와 실천의 중요성을 인식하면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문학언어의 구사에서도 어디서 본 것 같은, 세련됐지만 모방된 구절들이 눈에 띈다.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문학칼럼’에서 특히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왔는데 가령 고흐가 자살한 집을 방문해 기록영상물을 보고난 뒤 “주위 풍경이 달라 보인다. 하숙집 맞은편 교회와 시청건물이 그대로 예술 작품으로 둔갑하는 것이다”고 하는 진술은 ‘둔갑’이라는 표현이 예술적인 삶을 관조하는 여행자의 내면과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점이 고려되지 못한다. 이런 식이다.

송 교수의 칼럼은 주장과 표현이 과격해 팬과 적을 몰고 다닌다. 하지만 그 선명함이 진짜인지 自問이 필요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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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2006-02-19 21:25:01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whyisit 2006-02-19 20:45:34
프로이트의 책이라면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라는 책은 들어봤지만 <농담과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책은 처음 듣습니다. 어떤 책인지요? 그리고 간접 인용하신 구절의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