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19:35 (목)
권위란 '합리성' 넘어 도덕적·감정적 문제 아닌가
권위란 '합리성' 넘어 도덕적·감정적 문제 아닌가
  • 최석만 전남대
  • 승인 2006.02.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본격서평:『한국 사회 어디로 가나』조대엽·박길성 외 지음, 굿인포메이션 刊, 311쪽, 2005

사람은 위기를 싫어한다. 삶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위기라는 말이 이미 그것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위기라는 말을 즐겨 쓰는 사람들이 있다. 위기라는 말을 쓰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위기라는 말을 자주 쓴다. 정치학을 하는 사람들은 정치가 위기라고 하고 경제학을 하는 사람들은 경제가 위기라고 한다. 교육학자는 교육이 위기라고 하고 사회학자는 사회가 위기라고 한다. 대개 항상 그렇다. 이런 행태는 학문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관행이다.

지금처럼 위기를 강조하는 말과 글이 난무하다 보면 정말 필요있는 지식을 전달해주는 책이 드물어진다. 위기를 과장하기 위해 현실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어디로 가나』는 우리 현실을 비교적 정확히 진단해주고 있는, 얻을 것이 있는 책이다.

9개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 근대와 탈근대의 권위구조와 권위의 위기 2. 정보사회와 지식 권위 3. 민주주의와 권위구조 4. 정치사회와 권위구조의 변화 5. 기업의 지배구조와 시장 권위6. 시민사회와 권위 7. 가부장적 권위 이후의 가족 8. 문화 없는 문혁 시대 9. 세대와 권위이다. 제목에 나타난 것처럼 사회 각 부분에서 권위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그 대안은 무엇인가를 논의한다.

민주화 시기에 우리 사회는 부정하고 부수고 해체하는 데 열중해왔다. 민주주의라는 고귀한 결실을 얻기는 했지만 그간 우리 사회는 너무나 많은 것을 부수어버렸고 우리의 사고 또한 부정 일변도로 치달아왔다. 그런 예가 바로 권위이다. 권위는 민주주의와 거의 대립각의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 해체될수록 좋은 것이라는 것이 국민적 공감이었으며 감히 권위를 옹호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런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가능할까? 만약 권위가 필요하다면, 민주 시대에 바람직한 권위는 어떤 것일까? 이런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이 책의 필자들이 먼저 권위가 해체된 원인에 대해 진단한 것은 이렇다. 우리 사회는 독재체제로부터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하여 투쟁하였고 그 여파가 사회 각 부분에 파급되어 정치적 권위 뿐 아니라 경제 영역, 가족, 성, 교육, 지식인, 세대에 따른 권위를 부정하게 되었고, 이제는 민주화를 이끌어왔으며 사회 개혁과 권위 해체의 선봉에 섰던 시민단체들도 권위를 위협받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권위가 사라진 사회는 이상적인 사회일까? 필자들의 생각은 부정적이다. 서문에서 조대엽이 말하고 있듯이 “정당화되고 합의된 ‘권위’ 없이 사회질서는 유지되기 어렵다.” “권위의 구조는 질서의 또 다른 표현”(12-13쪽)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위, 권위적, 권위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권위란 인간관계에서 한쪽이 다른 쪽에 대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말하고 권위적, 권위주의는 자발성(혹은 정당성)이 결여되고 강제적으로 복종한다는 뉴앙스를 품고 있다. 우리 사회가 배격해왔던 것도 바로 후자이지만 민주화의 폭풍 속에서 우리는 모든 권위를 해체해왔다.

그런데 민주사회에서도 사람들은 왜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일까? 그리고 지평을 더 멀리 넓혀 생각해보면, 고대 사회부터 지금까지 권위라는 사회관계가 왜 있어왔던 것일까?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인데 불행히도 이 책에는 설명이 없다.

이에 대한 서평자의 견해는 이렇다. 그것은 권위 관계가 지배-복종이라는 비민주적 요소를 뛰어넘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권위의 필요는 일차적으로 개인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고 엘리트 이론가들이 말한 것처럼 대중들이 스스로 복종하고 싶어 하는 그런 노예적 욕구는 아니고 삶의 효용성을 추구한 결과이다. 어떤 사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확인되면 그 다음에는 검증해보지 않고 믿는 것이 효율적이다. 병을 항상 잘 치료하는 의사는 믿을 수 있는 의사이다. 항상 맞는 주장을 한 지도자는 믿을 수 있다. 과학은 맞다는 것이 계속 증명되어 왔으므로 과학자 집단은 믿을 수 있다. 기사가 항상 정확한 신문은 믿을 수 있는 신문이다. 이러한 믿음과 신뢰가 수세기에 걸쳐 누적되다 보면 검증해보지도 않고 믿는 관계, 거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권위 관계가 된다.

반대로, 어떤 연유에서건 과학자를 믿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에서 많은 곤란에 부딪친다. 과학자의 말을 일일이 증명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교육을 받으면서 교육자를 믿지 않거나 종교를 믿되 종교인을 믿지 않으며 정치인을 하나도 믿지 않는다면 큰 혼란에 처하게 되고 피해의식에 빠지게 된다.

이런 설명은 전통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전통이란 한 사회가 주어진 자연적 사회적 환경에서 만들어 낸 최대공약수적인 삶의 방식인데 이를 깡그리 부정하면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다.

그렇다면 민주 사회에서 필요한 권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필자들이 많지만 공통적 대안은 설득적 권위이다. 격려, 유인, 설명의 과정을 거쳐 상호 인정하는 권위이다. 모든 권위를 이렇게 설득해보일 수 있다면 좋다. 그러나 권위 중에는 상대방을 잘 설득할 수 없는 권위가 있다. 가정, 종교의 권위가 그렇다. 어린 아이에게 부모의 권위를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종교가 없거나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 한 종교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국가의 권위에도 이런 문제가 있는데 목숨을 바쳐 전장에 나아가야 하는 군인에게 합리적 설득이 설 여지는 좁다. 국가에 대한 헌신, 고향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정서적 유대의 문제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 과거의 가부장적인 권위 대신 이재경이 제안하는 ‘부모 권위에 대한 존중과 자녀의 자율성에 대한 인정’(259쪽)이라는 새로운 권위형태도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면 권위와 자율은 상충적이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정서적 유대가 더 중요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결국 권위란 합리적 교환 관계를 넘어서 감정적, 도덕적 차원의 인간관계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권위 관계를 합리성만으로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삶의 시간을 넘어 수세기에 걸쳐 누적된 복합적인 것이고 그런 관계의 합이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십여 년이 넘게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누가보아도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금 폭압적 권위 대신 법적 합리적 권위를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든 권위를 서구적인 법적 합리적 권위로 대체하려고 하는 것도 편협한 소견이다. 지금은 권위의 효용과 복합성을 알고 이성적 설득이 갖는 한계를 알며 이성과 감성과 도덕성이 함께 빚어내는 보편적인 권위의 형태를 모색해야 할 때이다.

이 책의 필자들이 권위의 급격한 해체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였지만 서평자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1980년대부터 유입된 주체사상과 같은 극좌파적 이념의 역할이다. 우리는 1960년대와 70년대 초 중국을 휩쓸었던 문화 혁명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이번에 출간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도 한국의 현대사에 대한 근본적 부정주의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시도라고 보여진다. 우리의 국체, 정당성, 사회 제도, 정체성, 사상을 모두 부정하였던 좌파적 시각은 민주화를 가져오는 데는 기여하였지만 현실 이해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퇴보를 가져왔다. 그것은 우리의 정치, 경제를 이해하는 데에도 그랬지만 특히 국제관계, 국제정치, 국제경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확산시켰다.

서평자가 덧붙이고 싶은 또 하나의 요인은 우리 사회 특유의 단일성, 순수주의, 관념주의이다. 이것은 곧장 극단주의에 빠지게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쪽 극단에서 저쪽 극단으로 왔다 갔다 한다. 독재에 대한 부정이 곧바로 전체 사회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고 그것도 철두철미하게 하려 한다. 문제는 현실은 관념보다 항상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다. 평등이라는 개념도 비슷한데 일단 평등이 목표로 자리 잡자 송호근이 말한 것처럼 완전한 평등, 기회의 평등 뿐 아니라 결과의 평등까지 요구하고 있다(290쪽).

역사는 끊임없이 흘러간다. 그러나 인간들은 ‘시대 구분’을 한다. 가끔은 인간 삶의 양태가 갑자기 바뀌기 때문이다. 시대구분을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변화에 맞춰 인간 삶을 다른 눈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눈으로 사회를 보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물체에 관성이 있듯이 사람의 생각도 관성이 있다. 시대가 달라졌지만 사람의 의식은 구시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우리는 더 이상 독재 체제에 살고 있지 않지만 우리의 의식은 독재 시대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해체해야할 때를 넘었다. 민주 사회에 맞는 건전한 권위와 사회 질서에 힘을 모아야 할 때이다.

필자는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에서 ‘개발도상국에 있어서 학생의 역할: 브라질과 터키의 역사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양의 사회사상과 현대 사회를 접목하는 사회학적 논문들을 주로 발표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공과 사 :유교와 서구 근대 사상의 생활 영역 비교’, ‘유교와 문화, 민주주의’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