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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이·히로나카 헤이스케·존 내시의 삶이 인도하는 하나의 행복
허준이·히로나카 헤이스케·존 내시의 삶이 인도하는 하나의 행복
  • 이재현
  • 승인 2022.07.25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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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공부는 고등학교와 어떻게 다를까?
사진=가톨릭대
학생은 고등학교까지의 교육 과정에서 ‘공부’를 한다고 하고, 대학에서는 ‘학문’을 한다고 한다. 학교는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배움을 주고받는 곳이다. 어떻게 보면 학문하기도 공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진=가톨릭대

대한민국 헌법 본문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제1조의 두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문장을 살짝 비틀어 ‘대한민국은 대학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학업권은 학생에게 있지만, 실제 권력은 대학에서 나오고 많은 사람들은 대학의 힘, 학력에 의존한다.’라고 적어 본다.

교육부가 고시한 각급 학교의 교육 목표를 보면, “중학교 교육은 초등학교 교육의 성과를 바탕으로, 학생의 일상생활과 학습에 필요한 기본 능력을 기르고 바른 인성 및 민주 시민의 자질을 함양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라고 되어 있고, “고등학교 교육은 중학교 교육의 성과를 바탕으로, 학생의 적성과 소질에 맞게 진로를 개척하며 세계와 소통하는 민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면 중등학교를 마치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데에 어려움이 없도록 학생들의 자질을 키우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는 말이다.

63.3%와 147.1% 사이 대졸 임금

과연 그럴까?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그냥 한국 사람으로서 사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을까? 그렇다면 굳이 대학에 가려고 이토록 애쓸 필요까지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고등학생과 그 학생의 학부모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기를 쓰고 입시 ‘공부’에 달려들고 있다. 전문적 지식을 쌓기 위해서라고 대학 진학의 이유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실상은 경제적 이유가 가장 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즉 돈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사람과 고등학교만 마치고 직장에 들어간 사람의 임금 차이는 상당하다. 지난 3월 24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1 한국의 사회지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대졸자를 100%로 한 교육 수준별 임금은 중졸 이하 47.6%, 고졸 63.3%, 전문대졸 77.0%, 대학원졸 147.1% 수준이다. 이러한 학력 간 임금 격차의 심각한 수준이 학생과 학부모를 대학 입시의 전쟁터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고교 교육과 대학 교육의 차이를 이야기하려다가 고졸과 대졸의 임금 차이를 먼저 살펴 보았다. 대학 교육을 받으려면 대학을 가야 하는데, 왜 그렇게 다들 대학을 가려고 하는지 밝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쿵푸’와 공부

절에서 시작된 신체 단련 공부가 무술의 한 종류로 정착하고 그 이름이 쿵푸, 즉 공부가 됐다. 사진=위키미디어

이제 대학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학생은 고등학교까지의 교육 과정에서 ‘공부’를 한다고 하고, 대학에서는 ‘학문’을 한다고 한다. 학교는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배움을 주고받는 곳이다. 어떻게 보면 학문하기도 공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 공부나 학문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반문할 이들도 있겠다.

그러나 그게 그것이 아니다. 원래 공부(工夫)는 불교에서 나온 용어라고 한다. 불법(佛法)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열심히 닦는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 공부이다. 중국의 소림사에서는 승려들이 불법을 익히고 마음을 닦는 수행의 하나로써 무술을 연마하기도 하였다. 절에서 시작된 신체 단련 공부가 무술의 한 종류로 정착하고 그 이름이 ‘쿵푸’, 즉 공부가 되었다. 불법과 마음의 수행이건 무술을 통한 신체 단련이건 공부는 어떤 특정한 지식이나 마음이나 동작을 갈고 닦는 행위였다.

그 과정 안에 탐구도 있겠지만 탐구보다는 반복적 수련과 수행이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복해서 갈고 닦는 공부도 배움의 한 방법이고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까지의 공부는 그러하다. 고등학교에서의 공부는 비판과 탐구의 과정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배움의 과정은 이와는 좀 궤를 달리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동양에서 학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논어(論語)를 펼칠 때 가장 처음 만나는 문장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이다. 고리타분하다는 말로 슬쩍 눙치듯이 말했는데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라면 이 문장을 한 번도 안 들어본 이는 없을 것이다. 논어에서 말하는, 배우고 또 때때로 그것을 익히는 것이 기쁜 까닭은 무엇인가? 배움이, 공부가 정말 기쁘고 즐거운 적이 있는가? 있었다면 얼마나 기뻤고 얼마나 즐거웠던가?

허준이 교수. 사진=위키미디어
허준이 교수(프린스턴 대학교)가 2022년 국제수학자대회에서 한국 수학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수학계 최고의 영예인 필즈상을 수상하였다. 사진=위키미디어

수학의 노벨상이라고 부르는 필즈상이 있다. 2022년 7월 5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 수학부 석학교수로 있는 허준이 박사가 이 상을 받았다. 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수학을 못했다느니 공부를 못했다느니 하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단순히 반복하여 암기하는 식의 공부가 그에게는 맞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기쁘고 즐겁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과감히 이를 거부하고 공교육을 잠시 벗어난 것이리라 생각한다.

허준이 박사보다 52년 전인 1970년에 필즈상을 받은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학문의 발견(学問の發見)』이라는 책을 썼다. 우리나라에서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학문이나 공부에는 ‘시험 공부’라는 말이 대표하듯이, 고통을 수반하는 지루한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 그러나 나는 학문을 즐거운 것, 기쁨을 맛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학문에는 배우는 일, 생각하는 일, 창조하는 일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학문을 하는 데에 기쁨과 즐거움만 있겠는가? 고통과 절망의 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히로나카 헤이스케보다 먼저 필즈상을 받을 뻔(!)했던 미국의 수학자 존 내시는 과도하게 학문에 몰입한 나머지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결국은 조현병 판정을 받았다. 이러한 그의 학문 연구와 삶의 모습을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존 내시는 필즈상은 받지 못했지만, 마침내는 조현병을 극복하고 1994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고, 2015년에는 필즈상의 67배 정도로 상금이 많은, 수학자에게 수여하는 또 다른 상인 아벨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게임이론 속 균형이론을 만들어 노벨경제학상까지 받은 미국 천재 수학자 존 내쉬도 조현병에 시달렸다. 사진=위키미디어

 

이성적 본성을 표출할 기회

대학에서의 교육, 학문하기란 곧 기쁨과 즐거움의 과정이라고 말하려고 필즈상과 관련된 세 명의 학자를 예로 들어 이야기했다. 대학에서의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의문과 비판 의식을 가지고 캐어 묻고 새로운 것을 찾아 나간다. 조동일 교수는 『우리 학문의 길』이라는 책에서 “학문은 이치를 따지는 행위이고, 무엇이든지 의심스럽게 보고 다시 검토하는 데서 시작된다.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라고 규정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견의 기쁨, 학문하는 즐거움을 찾게 되고,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부도 행복의 중요한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이것이 대학에서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에서의 교육, 학문이 중등학교에서의 교육, 또는 공부와는 다른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발견의 기쁨, 배움의 즐거움이 초중등학교에서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의 공부, 학문은 대학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이루어진다고 할 것이다.

단테가 ‘모든 지식인의 스승’이라고 불렀던 그리스 철학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썼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출발점은 행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부도 행복의 중요한 원천이라고 보았다. 공부가 우리에게 이성적 본성을 충분히 표출할 기회를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칼 포퍼 토론 방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적 이론을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낚기 위해 던지는 그물망에 비유하며 “우리는 세계를 합리화하고, 설명하고 정복하기 위하여 그물코를 더욱더 촘촘하게 만드는 데 열성을 다한다.”라고 말했다. 열성을 다해 과학적 이론의 그물코를 촘촘하게 만드는 이 과정이 바로 우리가 즐겁게 해야 할 학문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고교생들이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의 학문을 할 수 있는 날이 이제 멀지 않았다. 그러니 입시의 고통과 어려움을 잘 참고 이겨내기 바란다.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한국사고와표현학회 학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한국사고와표현학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성과 사랑의 시대 : 성, 사랑, 섹슈얼리티(공저), 열린 사고, 창의적 표현(공저), 현대 국어 축소어형의 사용양상 연구, 논리적 말하기(공저), 영화 로그인 - 사고와 표현 교육(공저),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교양 교육(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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