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경희 외 13인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612쪽
서구 근대화는 동아시아 패션역사를 일거에 바꿔 버렸다. 각국은 급작스레 들이닥친 서구문명에 대응하느라 격렬한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강력한 대변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복식의 ‘위로부터의 개혁’은 큰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전면적인 수용과 수구 가치관 사이에서 상당한 혼란을 야기했다.
조선의 한복, 일본의 기모노, 중국의 치파오는 패션의 서구화 속에서 전통이 어떻게 살아남았는가에 대한 좋은 사례이다. 일찍이 국가가 ‘복식’을 제정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각국(뿐만 아니라 중·근동, 아프리카를 포함한 제3세계가)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복식개혁을 했다는 것은 서구발 충격파가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다.
전통의상과 양복이 혼재됐던 시기는 달리 말하면 사상의 대립과 다변화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다. 새뮤얼 헌팅턴의 말을 빌리자면 문명의 충돌이었던 셈이다. 게리 왕(토론토 대학 미술사 박사과정)의 ‘머리 모양에서 머리 장식으로’ 챕터에 따르면 서구 근대화는 의복 이외에도 헤어 스타일마저 변화시켰다. 조선인들은 상투를 잘랐고 청나라 여인들은 량바터우를 잘랐다. 일본인들은 에도시대의 머리를 포기하고 서구인의 그것을 따랐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동아시아 복식개혁
후쿠자와 유키치 이후 줄곧 탈아입구를 외쳤던 일본은 서구화의 선두주자였다. 동아시아 패션의 변동이 제국주의와 강하게 유착되어 있다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한 일이다. 난바 도모코 오차노미즈여대 교수(문화사학부)의 ‘교복의 탄생’은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일환으로 군복과 교복이 등장했다고 소개한다. 식민지였던 한반도도 당연히 강한 영향을 받았다. 피지배국에 근대화는 원치 않았으나 어쩔수 없었던 변화였다. 선진문명의 위협과 동시에 이를 따라잡으려는 안간힘이었다.
노무라 미치요 장안대 조교수(관광경영학과)는 ‘거리에 노출된 권력의 표상’ 챕터에서 순사로 대표되는 서구식 제복은 식민국 민중에게 공포의 존재였다고 설명한다. 지배자의 상징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대척점에 있는 한복을 위시한 전통의복은 그야말로 계급화의 도식이었다. 물론 부정적인 영향만 끼쳤던 것은 아니다. 머지않아 강제와 억압을 넘어 비로소 자발적인 하이브리드 댄디즘의 물결이 몰아쳤다. ‘신여성’이 등장하고 ‘모던보이’들이 출현했다. 그들은 전 세대들처럼 더 이상 신문물에 거부감도, 적대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향유하고 즐겼다. ‘뉴 제네레이션’의 시대였다. 첨단을 선도하는 지식인들은 노골적으로 댄디즘을 표방했다.
한편 서구화는 동아시아 여성의 정체성을 고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타이완과 중국의 여인들은 치파오와 청삼을 자아의 문화적 상징으로 여겼다. 그것들은 일부 서구로 역수출돼 오리엔탈리즘의 이미지가 되기도 했다. 근대패션은 그간 근대·서구화라는 거대담론의 곁가지처럼 무시되거나 경시되어 연구조차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식문화사처럼 의복사 역시 중요한 삶의 근간을 이룬다.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여성학자들의 국제적인 연대가 만든 프로젝트
이 책 서문에서 밝혔듯 동아시아를 넘나드는 열 네명의 여성 저자들은 그간 베일에 쌓여있던 근대 패션사를 집필하기 위해 힘을 합칠 수밖에 없었다. 공동작업을 통해 미술사, 복식사, 시각문화 연구, 경제사 및 정치사, 젠더 연구간의 인위적인 경계를 허물었다. 학제간 연구를 통한 패션담론의 확장을 꾀했다. 희귀한 서적과 난해한 참고문헌의 압박을 국제적이고 다층적인 네트워크로 극복했다. 방대하고도 장구한 이 프로젝트는 총 4년간의 협업과 소통 끝에 출간이 됐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