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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북한의 모습이 가득했다
‘레닌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북한의 모습이 가득했다
  • 우동현
  • 승인 2022.07.20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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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장 북한사 사료 이야기③ 러시아 국립문서고 2부(레닌 도서관)

앞선 글에서 북한사 연구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모스크바 소재 국립문서고를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같은 도시에 위치한 러시아국립도서관, 일명 ‘레닌 도서관’ 또는 ‘레닌카’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레닌 도서관의 역사는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정러시아의 외무상이자 수상을 지낸 니콜라이 류먄체프 백작(Count Nikolai P. Rumyantsev, 1754~1826)은 조국의 역사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도서, 고문헌, 지도, 그림, 동전, 유물 등을 수집했다. 류먄체프 백작 사후 그의 동생 세르게이는 형의 유품을 국가에 기증했고, 1831년 당시 제정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류먄체프 박물관이 개관했다.

같은 박물관은 1862년 모스크바로 옮겨졌고,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국유화됐다. 곧이어 볼셰비키는 류먄체프 박물관이 소장한 회화 작품을 다른 박물관으로 이전하는 한편, 러시아 전역에 산재한 도서관의 장서들을 이 박물관으로 옮겼다. 1925년 당국은 류먄체프 박물관을 폐지하고, 이 기관을 소련레닌국립도서관으로 바꾼다는 결정을 내렸다. 냉전기 레닌 도서관은 소련의 국립도서관이라는 명성을 누렸고,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명소였다. 소련 해체 이후 레닌 도서관의 명칭은 러시아국립도서관으로 바뀌었지만, 이용객 대부분은 여전히 이 도서관을 레닌카라고 즐겨 부른다.

필자가 2019년 당시 촬영한 러시아국립도서관의 전경. 사진=우동현

코로나19 직전까지 북-러 도서교환 확인

북한사 연구자에게 레닌 도서관은 러시아 국립문서고와는 다른 성격의 보고(寶庫)이다. 한국에서 이용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북한 문헌이 소장돼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소련과 외국의 도서교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레닌 도서관이 접수한 장서들이다. 소련과 북한 사이의 도서교환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지만, 1948년 이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실시됐고, 1950년대 초중반부터 그 규모가 늘어났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양국의 도서교환은 코로나 팬데믹 직전까지 지속됐다. 

필자가 2019년 당시 촬영한 러시아국립도서관 동방문헌센터의 복도. 왼쪽 문으로 들어가면 대출을 도와주는 사무실이 있다. 사진=우동현

레닌카의 부속 기관인 동방문헌센터(Tsentr vostochnoi literatury)에서 북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동방문헌센터 소장 북한 자료는 크게 북한 신문, 학술·대중 잡지, 도서·책자, 당의 정책 방향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전원회의 결정서, 북한 최고지도자의 어록을 담은 선집·저작집·저작선집 등으로 나뉜다. 이중에서도 1945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의 기록들은 특히 값지다고 할 수 있다.

동방문헌센터 내에서 북한 자료를 신청하고 제공받은 모습. 레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한 서적이나 잡지는 대부분 이렇게 제본이 돼있다. 사진=우동현

북한, 1959년부터 외국 관헌에 정보 본격 제한

1945년~1950년대 후반 생산된 북한 문헌이 이후 시기 생산된 것들보다 더욱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자국 소재 외국 관헌에게 정보를 본격적으로 제한하기 시작한 것은 1959년이다. 전후 북한 외교를 도맡은 남일(고려인으로 러시아 이름은 야코프 페트로비치)이 같은 해에 외무상의 지위에서 박탈됐고, 고려인 출신 당료(黨僚) 다수가 소련으로 돌아갔거나 숙청됐다.

한때 소련공산당원인 이들로부터 북한의 실정을 파악했던 평양 주재 소련 대표부로서는 자연스럽게 획득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저하됐다.(같은 시기 북-중 관계는 강화됐으나, 관련 자료는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부터 1930년대 항일투쟁을 벌인 빨치산(partizan)들에 대한 과도한 찬사, 북한에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했다는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지면에 넘치기 시작했다.

1959년 출판된 북한의 아동용 도서. 책의 내용은 소련, 중국을 비롯해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방문한 북한 작가들의 기행문(‘오체르크ocherk’)을 수록하고 있다. 사진=우동현

1960년대 이후 생산된 북한 공간물과 달리, 레닌카에 소장된 1950년대 북한 문헌들은 다양한 북한 행위자들의 상대적으로 진솔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물론 그것들도 엄연히 선전의 일환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북한 당국이 스스로를 “사회주의 대가정”의 일원으로 보았던 만큼, “국제적”인 내용도 많이 담겨있다. 물론 1955년도 북한 식량위기처럼 북한 공간물이나 소련 자료만으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레닌카의 자료는 지금껏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북한 관련 사실들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새로운 북한사 연구의 가능성 열어 

북한의 원자력사(史)가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레닌카에 소장된 관련 북한 문헌을 거의 모두 읽었고, 북한 핵물리학자들이 1940년대 후반 플루토늄의 제조 원리를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다거나, 북한의 1세대 핵물리학자 정근이 세계 최초의 민수용 원자력 발전소인 오브닌스크 발전소를 방문한 최초의 코리언임을 확인했다. 가장 놀라운 점은 그 많은 문헌들이 거의 동일하게 원자력과 경제적 이득을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최근 서양 학계에서 진행 중인 후발국의 원자력 추구 노력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오늘날 북한의 문제적인 핵확산 활동은 1950년대만 해도 예정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56년 “북한 핵물리학의 아버지” 도상록이 집필한 원자력 관련 도서. 핵물리학의 출현부터 원자로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원자력의 다양한 모습을 쉽고 자세하게 풀어썼다. 사진=우동현

레닌 도서관 자료가 선사하는 북한사 연구의 가능성은 무척 높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사나 환경사처럼 북한사를 간학제적으로 볼 수 있다. 예컨대, 역사가 조수룡은 레닌카 자료를 이용해 기후변화에 따른 동해 명태 어장의 이동이 남북한 대결과 갈등에 미친 영향을 밝힌 탁월한 논문 「해류, 명태 그리고 NLL」(2020)을 썼다. 이 논문은 기존의 정치사 중심, 일국사 중심의 북한사 서술을 극복하고 인간 행위자와 비(非)인간 행위자인 명태, 환경의 상호작용을 재구성하여 북한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향후 더 많은 북한사 연구자들이 레닌 도서관의 자료를 이용해 새로운 북한사를 쓸 수 있길 기대한다.

지난 2회에 걸쳐 모스크바의 국립문서고와 레닌 도서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제정러시아의 중심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한 문서보관소(repository)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우동현 객원기자 / 요크대 박사후과정 
「Leveraging Uneven Cooperation: Socialist Assistance and the Rise of North Korea, 1945-1965」이라는 제목으로 UCLA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발행하는 『The Historical Journal』에 한국인 최초로 논문 게재가 확정됐다. 역서로는 『체르노빌 생존 지침서』, 『플루토피아』, 냉전기 미국 핵기술의 국제사를 다룬 『저주받은 원자』(가제), 국제공산주의운동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풀어낸 『전쟁의 유령』(가제), 국사편찬위원회 해외사료 총서 36권 『해방 직후 한반도 북부 공업 상황에 대한 소련 민정청의 조사 보고』(공역) 및 38-39권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소장 북한 인물 자료 Ⅱ·Ⅲ』(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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