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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비평_오태석 교수의 ‘용호상박’
연극비평_오태석 교수의 ‘용호상박’
  • 장성희 연극평론가
  • 승인 2006.02.0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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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한판 잘 봤네 그려"

상상놀이를 시작해보자. 무대 앞에서는 갈매기 날고, 한가운데서는 굿판 벌어지는데 뒤꼍 고추밭으로는 까치가 길을 열어 백년 만에 호랑이를 뫼셔오고, 말향고래가 사십년 만에 해안가를 들락거리며 물을 뿜는다. 시퍼렇게 날선 칼날이 장닭을 쫓고, 느닷없이 뭍에 던져진 전복은 상황을 뒤집으면서 호랑이 앞발을 물겠다고 야단이다. 용왕인가 싶으면 해마가 등장하고 호랑이가 위용 있는 귀물인가 싶으면 처마 밑 처량 맞게 비를 긋고 섰다. 이게 연극에서 가능할까. 오태석이 세운 무대에서는 이 모든 것이 너끈하다. 

문명의 휘황한 불빛에 뒤몰려 두고 온 저 너머에 이런 마을, 이런 굿놀음이 여적 벌어지고 있었던가. 대숲은 오늘도 서걱이고, 물고기는 용왕의 심부름을 도맡으며, 당장이래도 손 내밀면 호랑이가 손등 할퀴려드는 시간…. 서럽고도 원초적인 리듬의 무가 한 가락이 흘러나와 각종 컬러링에 봉인된 우리 귀를 열면, 문명에 허약해진 등골이 어느새 서늘해진다.   오늘날 어떤 연극은 하나의 주술 행위다. 잊고 사는 세계, 모두 경주마처럼 뛰느라 돌볼 틈 없는 것들을 연극은 무대 위 어둠 속으로 불러내 처진 것 등 다독이고, 누운 것 일으키고, 해진 것 깁고, 에인 데 다시 꿰매서 우리를 극장으로 초대한다. 극단 목화의 신작 ‘용호상박’이다. 

오태석이 쓰고 연출한 ‘용호상박’은 가까이는 형제들끼리 반목하는 역사의 형국이요, 멀게는 이 힘 좋은 기상을 누가 눌러놓았단 말인가, 제 가슴을 치는 연극이다. 황석영이 일찍이 비유한 ‘손님’, 이념간의 대립이 우리 마음과 강산을 휘젓기 전, 바닷길이 막히고 백두대간 끊겨 섬처럼 고립해 살기 전에 우리가 갖고 있었던 신명과 기상을 되불림 하려는 야심 찬 연극이다. 한 마을에서 집안 대대로 무업을 잇는 형제지간의 우애가 백 년 만에 찾아온 서낭신 호랑이로 인해 시험을 겪는 줄거리. 

호랑이는 민담과 굿 등 민속에서 본디 호색하고, 과욕한 귀물인지라 양반이든 외세든 자본에 길든 탐심이든 비유하는 바가 무에든 우리들 삶에 문제를 일으킬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이 말썽거리를 한 해에 쇠머리 하나로 잘 달래고 얼러, 함께 살자는 게 조상들 지혜인데 이 지혜를 잃은 세월이 그간이라는 것.

큰무당 제 팔자 그르치듯 상처하고 되는 일 하나 없는 형 지팔룡은 엄결하기만 하여 굿으로 장사 속을 챙기는 동생 지하룡을 호환과 재난에서 구하려 사방 뛰어다닌다. 꼬장꼬장 원칙을 지키는 형과 현실에 유연하고 물정 밝은 동생이 강사리 범굿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데 이 두 사내의 물러날 수 없는 갈등과 쌈질 판을 다독이는 건 현실에서도 그렇듯 여인네 몫이다. 좌충우돌 두 형제가 결국 피를 보고 말자 조근조근 낮고 따스하게 역신을 달래고 그 앙가슴에 묻은 신령함을 깨우치는 것은 지하룡의 처이자 이 땅의 지혜로운 여인의 대표 격인 ‘만신’인 것이다.

이 연극은 형식과 내용처를 굿과 동시대적 문제 상황에서 찾는다. 한마디로 관객에게 오늘날 우리 삶의 문제를 고민케 하되 그 이끄는 바는 ‘굿귀경’인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극장에서 굿 한판이 제대로 벌어졌다. 삼태기 하나, 검불 고르는 키 다섯, 호랑이 꼬리 한 가락, 쇠스랑 하나가 호랑이로 능청스레 둔갑해 무대에 선다. ‘용호상박’에는 구음이 있고, 주술이 있고, 춤이 있고, 무당 굿놀이가 있고 원초적인 흉내놀이가 있고, 재담이 있다. 이 펄펄뛰는 활어 같은 굿놀음을 원고지 그물로 잡아가두려니 민망코 부질없다.  

극단 목화의 젊은 배우들은 화사하고, 오태석과 삼십 년 연극을 함께 해온 전무송(형 역), 이호재(범 역), 정진각(동생 역) 세 배우가 내뿜는 무대 위 기품과 요기가 수려하다. 특히 여배우 이수미의 역량이 새삼 눈에 띈다. 무당다운 귀기와 냉기를 품고도 인간사 가련히 여기는 만신의 온후한 숨쉬기를 보여주면서 서늘하고 구성진 무가 가락을 극진히 뽑아낸다. 

영일 강사리 범굿, 호랑이가 사라진 오늘 뒷전에서 박제될 뻔한 우리 전통 문화유산이 현대연극의 이야기 틀과 극장 공간 안에서 아무런 낯가림 없이 녹아들어 호환, 외세 등 묵은 주제의 외연을 넓히고, 오늘날 동시대적인 주제로 다시 태어나는 데 성공했다. 

액자틀 무대에 비해 삼면이 열린 에이프런 형 극장형태인 남산 드라마센터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재개관을 알리더니 이번 우리 연극 ‘용호상박’ 굿 놀음에 제 품을 제대로 열어주었다. 갯가, 굿마당, 고추밭, 뒷길 그리고 공중에 널린 해마 조형물까지 오겹으로 울울한 공간미학을 더없이 서정과 깊이로 빛을 발하게 도왔고, 이로써 오태석의 연출미학은 한층 성숙한 성취를 이루었다. 설화와 현실, 굿과 연극, 전통 미학과 동시대적 주제 등 쉬이 겹을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모아 고요와 소란이 교차하는 속에서 풍성한 볼거리로 만들어 낸 것이다.

“어쩌다 내가 이 꼴이 됐나?” 두 형제를 아수라장 끝에 주검으로 만들어놓고 호랑이는 탄식한다. 떠나가는 호랑이 등에 대고 만신은 당부한다. “…다음에 오거든 살생 말고 명과 복을 주세요.”

조상님 이젠 쌈질 말고 화합을, 전쟁 말고 평화를, 주검 말고 생을, 펄펄 사는 신명을 주세요, 이 연극을 통해 오태석은 지성을 다해 빌고 있는 것이다.

장성희 / 서울예대·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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