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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전집 완간에 대한 기쁨과 몇가지 아쉬움
니체 전집 완간에 대한 기쁨과 몇가지 아쉬움
  • 강대진 건국대
  • 승인 2006.02.07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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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전집 3 : 유고,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비극적 사유의 탄생 외'(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1)을 읽고

드디어 니체 전집이 완간되었다. 이는 문화계의 큰 사건으로, 나같이 시류에 어두운 사람에게까지 축하하는 소식들이 들려온다. 사실 신기한 일이다. 아직 제대로 된 플라톤 전집도 나오지 않은 나라에 니체 전집이라니!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효과, 또는 인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건설적인 쪽, 즉 고전 전공자들도 분발해서 얼른 성과를 내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좀 불길한 쪽이다. 현대에 서양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책들은 ‘진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희랍과 로마의 작품들을 수시로 인용하고 상기시키는데, 아직 고전적 고대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대의 고전은 제대로 소화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 글은 기대와 우려를 함께 가진 채, 니체 전집 중 한 권을 슬쩍 살펴본 후에 적은 짧은 보고서다.


칭찬할 점은 물론 많다. 다른 것은 다 떠나서라도, 내가 사전 한 번 찾지 않고 니체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호사인가! 하지만 항상 좋은 것 위에는 더 좋은 것이 있기 마련이니, 더 좋은 번역, 더 나은 책 꾸밈새를 위해 그냥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적기로 하자.


나의 가장 큰 우려는 이 책이 아무 주석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독일어 원본(Walter de Gruyter판)에도 주석은 없다. 하지만 여기는 독일이 아니라 한국이다. 가령 「소크라테스와 비극」이라는 니체의 강연 원고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보자.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가 표현한 것처럼, 위대한 마지막 사자(死者)에 대한 동경을 느꼈습니다.”(33쪽) 번역이 틀린 것은 아니다. 거의 독일어 직역이다(Sehnsucht nach dem Letzten der grossen Todten, S. 533). 하지만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구심이 든다.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 희랍 비극이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 때문에 소멸했다고 주장하는 내용 속에 들어 있다. 시인이라기보다는 기본적으로 비평가인 에우리피데스가 소크라테스의 논리 중심주의를 따라 비극을 재조직한 결과, 원래의 비극은 죽어버리고 신희극만이 남겨졌다는 것이 논지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을 들어도 위의 문장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 문장이 특정 작품, 즉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 내용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희극 작품은, 에우리피데스가 죽고 나서, 더 이상 훌륭한 비극 시인이 없다는 것에 낙심한 디오뉘소스가 저승으로 에우리피데스를 다시 데리러 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위에 “위대한 마지막 사자”라고 된 것은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 최근에 죽은 이’ 정도로 하고, 거기에 주석을 붙였어야만 했던 것이다.


“에우리피데스가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에서 물 치료법으로 비극예술을 쇠진하게 만들고 또 비극예술의 중압감을 약화시켰다는 공로를 자신에게 돌렸는데”(35쪽) 같은 구절도 그냥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개구리」에 나오는 에우리피데스와 아이스퀼로스의 대결에 대한 언급이다. 위에 말한 대로 디오뉘소스가 저승에 갔더니, 마침 거기서는 두 비극 작가가 비극의 왕 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이제까지 아이스퀼로스가 차지하고 있던 명예를 최근에 도착한 에우리피데스가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오뉘소스는 두 비극 작가에게 누구의 실력이 더 나은지 대결을 벌이도록 하는데, 에우리피데스가 상대의 허풍스런 문체를 비난하며 자기의 ‘날씬한’ 문체를 자랑하는 대목이다. 자기는 그 동안 뚱뚱하던 비극을 날렵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 문장에서 “물 치료법으로 쇠진하게” 했다는 부분은, 설사제를 먹여 체중을 줄인 것을 가리킨다. 물론 위의 번역도 거의 원문 그대로다(er die tragische Kunst durch Wasserkur abgemergelt habe, S. 534), “쇠진”이란 말이 좀 강하긴 하지만.


에우리피데스가 대중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왜 그가 생시에 알량하게도 비극적 승리의 영광만을 얻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38쪽) 라고 한 것도 좀 달리 옮겨졌어야 했다. “비극적 승리의 영광”이라고 하면, 승리를 얻기는 했지만 그것이 비극적이었고, 뭔가 서글프거나 큰 희생을 치른 후에 얻어진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이것은 단지 에우리피데스가 비극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몇 번 못 했다는 말일 뿐이다. (그는 전 생애 동안 겨우 다섯 번 우승했다.) 따라서 여기서 “알량하게도 비극적 승리의 영광만을 얻”었다고 된 것은 ‘비극 대회에서 아주 드물게만 우승’했다는 정도가 될 것이었다.


내가 이따금 고전과 관련된 번역들을 보면서 아주 이상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국내에 이미 천병희 교수의 좋은 번역들이 나와 있는데 왜 사람들이 이것을 참고하지 않는지 하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다. “에우리피데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의 입을 빌려 아이스킬로스를 비난합니다. ‘...그가 사태를 논한다면, 그의 정신은 혼란한 것이다.’”(41쪽) 여기서는 우선 “개구리의 입을 빌려”라는 부분이 틀렸다. 비난하는 것은 에우리피데스 자신이고, 그 비난은 희극 작품 「개구리」에 들어있다. (이 작품에 개구리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디오뉘소스가 배 타고 지나가는데 꽥꽥대고 울 뿐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인용문인데, 무슨 가정문처럼 되어 있어서 만일 누군가 어떤 사태를 논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이 혼란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문장은 애당초 ‘당신은 말을 할 때 명료하게 하지 않는다’(「개구리」 1122행)는 뜻이다. 독일어 원문(Verworren ist er, wenn er den Thatbestand bespricht, S. 539)이 그런 혼동을 주기 좋게 되어 있긴 하지만, 국내 번역을 참고했더라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에 들어 있는 다른 글, 「비극적 사유의 탄생」에서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 「박코스의 여신도들」이 많이 언급된다. “어떤 사자(使者)가 햇볕이 내리쬐는 정오에 자신이 양떼들을 몰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고 이야기한다. (...) 알프스 초원 위에서 그 사자는 모여서 노래하고 땅 위에 한가하게 누워 정숙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세 부인의 무리를 발견한다.”(97쪽) 아무 주석도 없는 이 문장들을 보고서 이것이 에우리피데스 작품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알프스 초원”이라니? 물론 이것도 직역이다(Auf einer Alpentrift, S. 587). 하지만 희랍 문화에 대해 언급하는 중이니 Alpen이란 단어는 ‘산 속의’ 정도로 약하게 옮겼어야 했다. 그리고 산 속에서 여인들의 무리를 발견하고 보고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긴 하지만, 발견 당시에는 “사자”로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목자로서 그런 것이니, ‘그 사람은’으로 하는 것이 이해하기에 더 좋았을 것이다. (나만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갑자기 알프스도 나오고 해서 처음엔 짐승 사자가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인 줄 알았다.)


위의 문장들에 이어, 그 여자들의 무리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려지는데,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의 직접 인용이다. “(...) 달콤한 꿀이/ 바쿠스 지팡이의 담쟁이덩굴 관에서 흘러나온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의 증인이라면,/ 너희는 틀림없이 신에게 경건한/ 충성을 맹세하였을 것이다.”(98-9쪽) 이 인용문에서는 “증인”이라는 너무 곧이곧대로인 번역어가, 그리고 접속법을 좀 더 강하게 옮기지 않은 것이 문제다(du sicher, wärst du Zeuge dess gewesen, fromm/ dem Gott gehuldigt hättest, S. 587). ‘당신이 이 광경을 직접 보았더라면 당신도 그 신을 섬기게 되었을 것이다’란 뜻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와 아이스퀼로스의 관점을 비교하는 대목에 나온 구절은 너무 심오하게 옮겨졌다. “영웅적 인간은 어떤 덕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가장 고귀한 인간이다.”(111쪽) 뭔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멋진 경구 같은데, 사실은 번역 과정에서 한 구절이 빠졌다. 그냥 “영웅적 인간”이 아니라, ‘소포클레스가 무대에 올린 영웅적 인간’ 정도가 될 구절이었던 것이다(Die heroische Menschheit, die bei Sophocles die Bühne betritt, S. 597-8). 그리고 그런 영웅은 “어떤 덕성도” 지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저(jener) 덕성을’, 즉 절제를 지니지 않은 것이다.


지면이 모자라 더 언급할 수는 없지만, 오이디푸스가 “자기 생모를 해방”(130쪽)시켰다고 한 것은 ‘생모에게 구혼했다’(freienden, S. 614)고 고쳐야 하고, 햇빛이 비치면 노래했다는 “거대한 멤논 기둥”(130쪽)도 각주를 붙여 설명해주어야 할 부분이다.


중요한 단어들을 잘못 표기한 것도 종종 눈에 띈다. 가령 복수의 여신인 에리뉘에스는 “에리스”(75쪽) “에레니메스”(110쪽) 등으로 되어 있고, 아이스퀼로스도 “아르킬루스”(29쪽)로 나온 곳이 있는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며, "에폭푸테스"(137쪽)는 ‘추종자들’(Epopten, S. 620)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


비극에서 첫 합창이 나오기 전의 부분(prologos)을 가리켜 “서곡”(39, 141쪽 등)이라고 한 것도 달리 고쳐야 할 것이다. 운율이 있기는 하지만 음악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계장치에 의한 신”(deus ex machina)를 “자동해결사인 신”(41, 143쪽 등)이라고 한 것도 고치는 게 좋겠다. 후자는 이 단어를 중립적인 전문용어로서가 아니라, 비난의 뜻으로 사용한 것이다.


한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것도 우려를 자아내는 점인데, “변신론”(101쪽)이 ‘신을 변호하는 논증’(辯神論)이라는 것, “명법”(67쪽)이 ‘명령’(命法)이라는 것은 요즘 사람들에게는 얼른 떠오르지 않겠기 때문이다.


공들여 번역한 글을 두고 공연히 많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실 위에 지적한 사소한 점들은 이 전집의 출판이 갖는 의의를 전혀 훼손하지 못한다. 단지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낫게 손질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몇 자 적어보았을 뿐이다. 관련자들께서는 너무 많이 노여워 마시길, 그리고 조금만 신경을 써주시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이 글은 출판저널 2월호에 게재되었던 원고입니다. 출판저널과 강대진 교수의 동의를 얻어 교수신문 인터넷판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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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사랑 2006-02-08 23:43:23
"물론 독일어 원본(Walter de Gruyter판)에도 주석은 없다." - Walter de Gruyter판에는 주석이 있습니다. 다만 별도의 권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