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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교토제국대학은 ‘대동아학’을 왜, 어떻게 개발했나
도쿄·교토제국대학은 ‘대동아학’을 왜, 어떻게 개발했나
  • 김재호
  • 승인 2022.07.1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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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학 다시 읽기

‘동양’제패 이데올로기 지적,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연구발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공동학술대회 개최

“도쿄·교토제국대학은 ‘대동아학’을 개발하며 일제 식민사학에 이바지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한국사)는 지난 7일 열린 ‘일제 식민사학 다시 읽기: 일국사적 시각 넘어 장소, 사람, 기관 중심으로’ 학술대회에서 이같이 발표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1939년 군부 황도파의 중심인물이던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문부성 대신이 되어 도쿄·교토 두 제국대학이 새로운 ‘동아학’ 확립에 나설 것을 종용했다. 그 결과 1939년 교토제대 인문과학연구소, 1941년 도쿄제대 동양문화연구소가 발족하며, ‘동아학’, ‘대동아학’을 만들었다. 

 

지난 7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선 ‘일제 식민사학 다시 읽기’ 학술대회를 통해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최세정

중일 전쟁이 대동아전쟁으로 확대될 때, ‘대동아공영권’ 이론을 위해 도쿄·교토 두 제국대학에 동양문화ᐧ인문과학연구소가 세워지는 과정이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처음으로 밝혔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공동개최한 이번 학술대회는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의 연원과 기반의 비판적 검토를 통해 식민주의 역사학을 극복하려 노력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사회평론아카데미)’의 연구 성과를 알리고자 기획됐다.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는 일본 제국의 식민주의 역사학은 한국사 하나가 아니라 ‘동양’제패 이데올로기로 지적한다. 그 이데올로기를 생산한 주요 조직인 도쿄, 교토 제국대학과 언론계, 조선총독부박물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조사부, 조선총독부 중추원과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학, 일본 외무성 산하의 동방문화학원 등을 구체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오영찬 이화여대 교수(사회과교육과)는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식민주의」 발표에서 “한국 박물관사의 초기 역사이자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사인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오 교수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을 통해 열패한 식민지 문화가 어떻게 전파되었으며, 조직과 인력, 소장품의 출처와 상설전시를 통해 식민지 박물관의 토대가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폈다. 오 교수는 총독부박물관의 상설전시가 “조선 문화의 유구성, 고유성, 우수성이 아니라 타율성, 정체성 등 열등감을 조장하고, 일본과의 친연성을 의도적으로 부각해 식민지 신민으로서의 의식을 고양한다는 식민지 박물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였다”라고 지적했다. 

정상우 서울과학기술대 교수(기초교육학부)는 「만선사, 그 형성과 지속」 발표를 통해 만선사의 체계화를 시도한 유일한 연구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1876~1940)를 분석했다. 여기서 ‘만선사’는 만주·조선사를 뜻한다. 정 교수는 “만선사는 대륙 침략을 위해 고안된 것인 동시에 대륙의 영향이 절대적인 반도라는 지형에 조선을 가두고 일본사의 타자로서 만선이라는 대륙의 역사를 서술했다”라며 “대륙과 일본의 관계를 해명하여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을 극대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준형 서울시립대 교수(국사학과)는 「제국 일본의 동아시아 공간 재편과 만철조사부」 발표에서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남만주에서의 러시아의 이권을 계승하여 설립했던 국책회사로서, 만주 지역의 주요 산업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철도부속지를 통한 영역 지배까지 실현했다고 설명했다. 만철조사부는 그 지배를 뒷받침하기 위한 기초 조사는 물론 정책 입안까지 간여했던 까닭에 제국의 ‘싱크탱크’라고도 일컬어진다. 만철의 초대 총재로서 만철조사부를 설립한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857~1929)의 말을 빌리자면, 만철조사부는 ‘문장적 무비(文裝的武備)’, 곧 비군사적 시설을 통해 군사력을 증진하는 핵심적인 기구였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을 발표한 서영희 한국공학대 교수(지식융합학부)는 1990년대 식민지 근대화론의 등장은 일제 식민사학의 근대사 인식, 즉 개항 이후 병합에 이르는 고종시대사에 대한 망국책임론 프레임과도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서 교수는 “한국 고·중세사 인식에서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은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지만, 개항 이후부터 병합에 이르기까지 고종시대사에 대한 인식에는 여전히 식민사학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서 교수는 “망국책임론은 자연스럽게 일제에 의한 ‘문명화’의 논리로 귀결되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 재등장의 배경에 깔린 서사구조”라고 밝혔다. 지금까지 수많은 식민사학 비판이 있었지만 대부분 고대사부터 조선시대사에 집중되었고 식민사학의 근대사 서술에 대한 비판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경성제대 교수였던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오다 쇼고(小田省吾) 등을 분석했다.

정준영 서울대 교수(규장각한국학연구원)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 발표에서 “경성제국대학에서는 근대적인 것과 제국적인 것, 그리고 식민지적인 것 사이의 긴장과 길항(拮抗)이 불가피했다”라며 밝혔다. 정 교수는 “경성제국대학은 본토 제국대학과 같은 ‘격(格)’을 유지하기 위해서 ‘학술’, ‘보편’, ‘제국’ 따위의 가치를 등한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라며 “식민통치의 인식을 뒷받침해야 하며, 실제 정책 수립에 필요한 배경지식을 구축하는 데에서도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했다”라고 분석했다. 

허영란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는 「남양과 식민주의」 발표를 통해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를 소개했다. 제1부는 1910년대 중반 북진론과 남진론이 만나 재구성된 남북병진론을 주창했던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의 논의를 통해 이후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가게 되는 이념적 단초를 살폈다. 제2부에서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궤변의 현실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제국의 군사적 남진정책의 내용과 그것이 전개된 역사적 과정을 검토했다. 제3부에서는 일본제국의 식민지학이라는 맥락에서 남양과 남방 연구를 위한 조직과 제도, 프랑스와의 학문 교류 실태를 소개했다. 「보론」은 남양·남방의 관점에서 살펴본 대동아공영권과 일본제국의 직접 식민지였던 한국을 연결해 살펴보고자 한 고심의 산물이라고 허 교수는 설명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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