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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8] 아나키스트보다도 더 아나키스트다운 아나키스트, 바쿠닌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8] 아나키스트보다도 더 아나키스트다운 아나키스트, 바쿠닌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7.1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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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일 바쿠닌
미하일 바쿠닌은 주요 이론은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이었다.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를 주장하는 혁명주의적 사상이다. 사진=위키미디어

아나키즘의 역사에서는 보통 각각 영국(고드윈), 독일(슈티르너), 프랑스(프루동) 출신 세 사람의 선구자에 이어 아나키즘을 대성시킨 러시아인은 바쿠닌, 크로포트킨, 톨스토이이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서로 너무나도 다르다. 특히 앞의 두 사람은 ‘행동적 아나키스트’인데 반해 톨스토이는 ‘종교적 아나키스트’다. ‘행동적 아나키스트’의 원조가 바로 바쿠닌이고, 크로포트킨은 ‘코뮌주의 아나키스트’로 불렸다.  바쿠닌은 혁명적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집단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우리말로 아직 제대로 번역된 적이 없어 유감이다. 

아나키스트가 살았던 곳이나 묻힌 곳을 여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나는 러시아를 몇 차례 여행하면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흔적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나 크로포트킨과 달리 바쿠닌의 흔적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아마도 마르크스와 극단적으로 대립한 탓이겠다. 바쿠닌의 흔적은 스위스 베른의 브렘가르텐(Bremgarten) 공동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 정도 외에는 러시아 밖에서도 찾기 어렵다. 지금은 공원으로 그의 무덤도 평화롭게 보이지만, 그가 묻힐 즈음의 그곳은 황무지 들판이었다. 
19세기 유럽의 가장 위대한 혁명가였던 그의 흔적이 이렇게도 찾기 어려운 것도 지금은 혁명의 시대가 아니라 그 배신의 시대인 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바쿠닌의 원래 묘지에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십시오”라는 이상한 말이 쓰였으나, 2015년 기념 플레이트는 그의 “불가능한 일을 감히 하지 않으면 결코 가능한 일을 이룰 수 없다”라는 인용문을 포함하는 청동 초상화 형태로 교체돼 바쿠닌의 묘비답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스위스에서도 그런 교체가 2005년에야 가능했다니 한국에서 바쿠닌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여 크게 실망할 일이 아니다. 

 

바쿠닌의 자유대 마르크스의 평등

미하일 바쿠닌의 묘비.
미하일 바쿠닌의 묘비. 그의 무덤은 베른의 브렘가르텐 공동묘지에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묘비명과 비슷하면서도 더 유명한 바쿠닌의 말이 “창조를 위해 파괴하라”라는 것이다. 이는 “마누라 말고 다 바꾸어라”라는 이건희의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이건희가 자신을 아나키스트 바쿠닌과 비교한 적은 당연히 없지만, 바쿠닌을 경영술의 대가로도 보는 견해도 있다. 미국에서는 ‘비판적 경영연구(critical management studies)’ 분야 연구자들이 바쿠닌과 아나키즘, 특히 리버테리언 코뮌주의(libertarian communism)을 연구한다. 그들은 일과 삶을 조직하는 대안적인 비자본주의적 형태를 제안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런 걸 연구한다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허기야 경영학 분야만 그럴까? 나는 1980년대에 ‘비판적 법학연구’에 관심을 갖고 그 본산이라고 할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1년 반 정도 유학한 적이 있으나, 결국 한국에서는 도저히 먹히지 않는 이야기임을 알고는 연구를 포기했다. 다른 학문분야에서도 ‘비판적’이라는 말이 붙는 연구가 불가능한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무덤
마르크스는 영국 런던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사진=위키미디어

오늘날 바쿠닌이 다시 등장하는 이유 중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마르크스주의적-권위주의적 사회주의의 비판에 있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던 19세기에 바쿠닌만큼 그를 철저히 비판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마르크스 비판은 반공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인용될 정도이다. G. D. H. Cole이 말했듯이 바쿠닌은 “자유로 시작하여 자유로 끝난다.” 반면 마르크스는 “평등으로 시작하여 평등으로 끝난다.” 바쿠닌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도 불평등과 소수가 민중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비판했으나, 그러한 불평등과 착취가 자유를 침범하는 통치 권력의 압제에 의해 발생하는 악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자유를 떠나서는 어떤 선도 없고, 자유야말로 참으로 그 이름에 값하는 모든 선의 원천이며, 그 절대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선은 자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자유는 불가분이므로 그 일부를 침범당하면 그 전체가 살해된다고 바쿠닌은 주장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스타브로긴과 바쿠닌

또한 비인간적인 매력도 체 게바라(Che Guevara)의 경우처럼 바쿠닌이 재등장하는 원인이 된다. 바쿠닌의 인간적인 매력은 그 파란만장한 일생, 소설 이상으로 소설적인 삶, 영화 이상으로 영화적인 삶에서도 찾을 수 있다. 최근 영화로는 이탈리아의 지안 프랑코 카비두(Gianfrasnco Cabiduu)가 감독한 1997년작 <바쿠닌의 아들(Il figlio di Bakunin>이 있다. 

바쿠닌의 아들인 툴리오 사바(Tullio Saba)의 이야기를 통해 바쿠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영화이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 말까지 광부, 가수, 노조원이었던 사바를 알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사르데냐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분투하는 세상을 반영한 고독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민중의 지도자인 바쿠닌의 아들 툴리오 사바의 정체는 흐려진다. 영화는 그가 도둑이었고 살인자였을까 아니면 반역자였을까, 아무 소용이 없거나 도망자였을까. 열정적인 연인 또는 이익을 취하는 사람, 배신자인가 영웅일까를 묻는다. 이러한 질문은 묘하게도 아버지인 바쿠닌에게도 해당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바하일 바쿠닌을 자신의 소설 속 모델로 쓰기도 했다. 『악령』에 나오는 무신론자 스타브로긴이 바로 바쿠닌이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수많은 사람들이 바쿠닌의 전기를 썼고 우리나라에도 카(E. H. Carr)의 탁월한 전기가 두 차례나 소개되었다. 카는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마르크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러시아 아나키스트인 게르첸의 전기와 함께 바쿠닌의 전기를 썼고 그 모든 전기들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있으나, 바쿠닌의 전기가 가장 탁월하다. 바쿠닌은 도스토예프스키나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의 소설의 모델이기도 했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무신론자 스타브로긴이 바로 바쿠닌이었다. 

당시의 바쿠닌은 누구보다도 철저한 무신론자의 표상으로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보수적인 러시아 지성들의 비판 대상이었다. 스타브로긴은 바쿠닌처럼 귀족 가문 출신의 미남 청년으로 유럽에 유학하기도 하고 동양까지 여행하여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뛰어난 이성을 갖춘 동시에 야수적인 폭력에 휘말리기도 하는 모순된 인간이다. 천박함과 고귀함, 허무주의와 영혼주의, 종교와 윤리, 지성과 정치 등 모든 측면의 극단들을 공유하는 그는 흔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리트미와 이반, 알료샤와 스메르자코프 등 네 형제를 합체한 존재로 결국은 스스로 목을 밧줄에 매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스타브로긴과 실제의 바쿠닌은 사실상 많이 다르다. 한편 투르게네프의 <루딘Rudin>(1856)은 항상 철학적 사색에 젖어 헤겔을 신봉하는 불같은 정의감의 소유자이지만, 의지력의 결핍 때문에 현실 생활에서는 무능한 주인공 루딘을 1840년대부터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전형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아담과 이브는 신의 명령에 불복함으로써 인류를 해방시켰다

나는 아나키스트는 보수파가 비판하는 혼란과 파괴의 전형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세상을 정화시키는 만년 청년이라고 본다. 아나키스트는 항상 원칙에 충실하고 철저했으며 타협을 거부했다. 그야말로 지식인으로서, 사상적 대결의 가장 철저한 모범으로서 그들은 평생을 두고 원칙에 충실하고자 집요하게 싸웠고 진지한 정신적 고투를 경험했으며 철저하게 결단했다. 그 가장 순수한 원형이 바로 바쿠닌이었다. 그는 그 어떤 아나키스트보다도 더 아나키스트다운 아나키스트였다. 그래서 우드코크는 그를 “파괴의 충동”으로 상징화했다.(우드코크, <아나키즘>, 164쪽)

그러나 나는 바쿠닌을 무엇보다도 자유의 사상가로 본다. 바쿠닌이 말하는 자유는 공동체 의식에 투철한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외 없이, 평등하게 누리는 자유이다. 따라서 자유는 고립된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며 사회적인 것이다. 개인의 자유만이 아니라 민족의 자유도 그렇다. 바쿠닌이 평생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것은 바로 그러한 연대적 자유론에 근거한다. 

바쿠닌은 아담과 이브가 '인간적 자유의 최초 행위'를 했다고 봤다. 신의 명력에 불복함으로써 인류를 해방했다는 것이다. 사진=위키미디어

바쿠닌은 아담과 이브가 자신들에 대한 명령이 전제주의적이라는 것을 알고 그 명령에 굴복하여 굴욕적인 노예 상태에 빠지기보다는 그 명령에 불복함으로써 인류를 해방하고 구제했다고 해석했다. 곧 “인간적 자유의 최초 행위”였던 것이다. 인류의 조상은 “반역과 사고”의 능력을 지녔고, 그것을 부추긴 사탄이야말로 “영원한 반역자, 최초의 자유사상가, 세계의 해방자”라고 보았다.

바쿠닌은 근대 사회계약론자들이 “전체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부정하는 데서 국가가 출현한 것으로 보았다고 비판한다. 곧 계약 체결에 의해 성립한 사회가 바로 국가였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쿠닌은 사회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으로서 계약과는 무관한 “인간 집단성의 본원적 존재 양식”이라고 본다. 따라서 계약론자들이 사회 이전의 상태로 상정하는 자연 상태도 바쿠닌에게 있어서는 사회이다. 바쿠닌은 계약론자들이 자유를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보고 그러한 방종의 무질서를 피하기 위해 자유를 제약하는 계약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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