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0:45 (금)
다시 만난 위계
다시 만난 위계
  • 조지훈
  • 승인 2022.07.12 09: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조지훈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어느덧 제도권 대학 “바깥”의 연구실에 몸을 담은 지도 10년이 넘었다. 나에게는 대학원에서 보낸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이다. 따라서 학문후속세대의 재생산 문제를 접했을 때, 먼저 떠오른 곳은 대학보다도 대학 바깥의 연구실일 수 밖에 없었다. 이 공간들에서 재생산의 위기는 곧바로 구성원들 간의 격화된 갈등과 결부되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결말은 문을 닫는 것으로 이어졌다. 물론 대학처럼 큰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금방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을 만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재생산의 위기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다시 찾아왔고 사소해 보이는 몇몇 사건들을 계기로 또다시 위기의 순간을 맞이해야만 했다. 몇 차례 반복된 경험을 통해 이러한 위기는 구조적인 문제임을 깨달았다. 

재생산의 문제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은 대학 바깥의 연구실에서도 큰 요소를 차지한다. 구성원들의 생존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의 생존을 위해서도 분투해야만 했다. 연구실을 통해서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탈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적어도 나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이러한 어려움이 공간을 꾸리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갈등의 요인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생계 문제는 늘 중요했지만, 이것이 재생산의 위기를 가져온 첫 번째 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연구실 구성원 간의 지적 차이에 따른 위계, 역할의 비대칭, 재생산 노동의 분배 문제와 같은 갈등 속에서 위기가 찾아왔다. 

특히 지적인 차이에 따른 위계는 학계의 위계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바깥”을 표방했던 연구실에서는 역설적이고 인정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학문적인 지식이 축적되어 이를 외화할 수 있는 구성원들은 교사가 되었고, 아직 부족한 구성원들은 그런 교사에게 배우는 학생이 되었다. 대학처럼 조건이 미리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공간을 떠받치기 위한 대다수 노동들은 학생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교사와 학생의 역할이 대학처럼 완벽하게 분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는 했다. 또한 연구실을 유지하기 위한 재생산 노동에 교사들도 분명 참여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재생산 노동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혹은 그런 분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주도권은 교사들에게 있었고, 따라서 지식 노동을 할 수 없다면 재생산 노동을 더 많이 해야 하는 구조는 변하기 어려웠다.

한때 연구실의 현판에 걸렸던 “좋은 앎과 좋은 삶의 일치”라는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지식 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비대칭적 구조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대학 바깥의 연구실들은 공부를 통해 삶을 변화시키려는 수행적인 앎을 지향했지만, 맹점은 그러한 앎을 생산해내는 조건들 또한 생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연구실은 물리적으로 제도권 대학 바깥에 위치했지만, 연구실을 운영하기 위한 재생산 노동의 형태는 이미 구축된 지식 생산의 구조에 포함된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바깥이라는 말에 홀렸는지도 모른다. 대학의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대학 바깥으로 나간다면, 제도권의 지식 생산 구조와 단절하고 완전히 다른 조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다. 물론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활동에 반성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연구실의 재생산 문제가 생존을 넘어선, 지식 노동의 조건을 창출하는 구조에 대한 문제로 인식된 것은 부끄럽지만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렇다면 대학은 어떨까? 당연히 대학에서도 재생산 노동 없이 지식 노동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대학의 구성원들은 학교를 운영하는 재생산 노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학업에 손해를 끼치면 소송도 불사할 수 있는, 학교가 계약한 외주 업체의 서비스처럼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대학 바깥의 연구실에서는 지식 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비대칭적 구조는 구성원들 사이의 문제였다. 하지만 대학에서 이러한 비대칭적인 구조는 구성원과 비구성원 사이의 문제라는 점에서 더 큰 맹점일 수 밖에 없다. 

대학에서 지식 노동과 재생산 노동 사이의 갈등을 자신의 문제로 경험할 수 없다면, 이는 대학이 재생산 노동을 고용이라는 형태로 양자를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리 속에서 대학의 구성원들은 대학 바깥의 연구실 구성원들과는 달리 재생산 노동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이 좀 더 쉽게 학업 시간을 확보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편리함 속에서 여전히 재생산 노동은 지식 노동의 맹점으로 남게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맹점 속에서 지식 노동의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어떤 한계를 지니는지는, 이미 대학 “바깥”에서 목격했다. 

조지훈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회원이다. 데리다에서 버틀러로 이어지는 기록·기입·쓰기의 수행성 이론을 연구하고 있다. 최근 발표한 논문으로는 「수행성의 시간적 형식」, 「수행성 이론에서 허구적 발화의 문제」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