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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경의 세계만화읽기] 엔키 빌랄
[성완경의 세계만화읽기] 엔키 빌랄
  • 성완경 교수
  • 승인 2000.11.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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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25 11:56:14

만화의 1차적 토양은 풍부한 그림책의 전통이다. 동화책, 일러스트레이션 북, 그리고 요즘 유행하는 이미지 북 계열이 그런 책들이다. 그림이 들어간 이야기책은 남녀노소 없이 누구나 좋아한다. 그런데 주의해 보면 우리 사회에는 어른이 즐길만한 그림책이 없다. 그림책 문화는 아동기와 더불어 마감된다. 본격적인 성인용 만화, 특히 ‘그래픽 노블’ 류의 만화가 얼마나 심오하고 재미있는 문학일 수 있고 또한 미술 혹은 영화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책이 없다는 것은 우리 출판문화의 기이한 결핍이자 불구다.

최근 우리의 이런 현실에 도전장을 던지는 유럽의 본격 성인 독자(더 정확히는 성숙한 독자)용 만화책이 연달아 몇권 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피터 팬‘(루아젤), ‘상브르’(이슬레르), ‘잉칼’(뫼비우스+호도로우스키), ‘제롬 무슈로의 모험’(부크), 그리고 ‘니코폴 3부작’(빌랄)이 모두 올 가을에 출간된 것들이다. 이 밖에도 몇권이 더 출간 준비가 끝난 상태다. 이것은 전례 없는 새로운 문화 현상이다.

“완전히 독자적인 표현 수단으로서의 만화가 등장하였다”(르 몽드). “영화에 ‘시민 케인’의 오손 웰즈가 있다면, 만화에는 ‘니코폴’의 엔키 빌랄이 있다”(리베라시옹). 출간 당시 ‘니코폴’ 연작에 쏟아진 프랑스 두 일간지의 찬사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월간 서평지 ‘리르 Lire’는 이 책을 문학예술, 인문과학, 자연과학 등 모든 장르의 출판물을 제치고 ‘그 해의 최고의 책’으로 선정하였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아직도 ‘니코폴’은 SF 만화의 가장 예외적이고 독보적인 작품의 하나로 평가된다.

엔키 빌랄이 처음으로 시나리오와 그림 모두를 쓰고 그렸던 이 3부작에서 빌랄은 스포츠와 사랑, 사이언스 픽션과 동물적 환상, 이집트 신화학을 한데 뒤섞은 예감에 충만한 표현으로 거대한 SF 정치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두텁게 그린 회화 같이 끈적거리고 무거우면서도 관능적인 그림과 색채 표현은 독특한 회화적 감성을 보여준다. 빌랄은 생후 첫 십년을 이차대전의 망령이 배회하는 끔찍한 동구권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보냈으며, 그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무거운 질감은 이 황폐한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표현 수단은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아이러니로 가득찬 빌랄의 작품을 표현하는 적절한 것이었다. 작품의 배경은 2023년의 독립 도시공화국 파리. 총통선거를 코앞에 둔 불안한 정세 속에서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치열하다. 파리는 지금 부와 권력을 독점한 도시 중심지구에 사는 소수의 백인 특권층과, 끝없이 이어진 황량한 교외 빈민지구에 사는 절대 다수의 다인종 극빈 계층, 이렇게 두 개의 사회계급으로 극명하게 나뉘어있다. 또한 주변의 다른 도시국가들과의 마찰과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극도의 파시스트적 군국주의로 치닫고 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도시의 상공에 머무르고 있는 신들의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비행 물체가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신들과 현직 총통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냉동상태로 수면 중인 알시드 니코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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