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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본스
노 본스
  • 최승우
  • 승인 2022.07.01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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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번스 지음 | 홍한별 옮김 | 창비 | 472쪽

한림원 내의 잇단 성 추문으로 인해 노벨 문학상 시상 자체가 취소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던 2018년, “소문과 정치적 충성이 개인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운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준다”는 평과 함께 『밀크맨』으로 50주년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애나 번스의 데뷔작 『노 본스』가 창비에서 발간되었다.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대담하고 능란한 서술과 훨씬 더 날것 같은 생생한 언어와 천연덕스러운 블랙 유머로 애나 번스의 천재적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은 『밀크맨』과 마찬가지로 북아일랜드 분쟁 시기, 즉 ‘트러블’을 배경으로 벨파스트 북부의 한 마을에 사는 소녀 어밀리아와 가족, 이웃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문제, 골칫거리, 소요를 뜻하는 영어 단어 ‘trouble’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정관사가 붙고 복수형이 된 ‘The Troubles’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에 걸쳐, 지리상으로 아일랜드섬에 속하나 영국 영토인 북아일랜드에서, 과거에 한 나라였던 아일랜드와 재합병하려는 가톨릭교도 세력과 현재 속한 국가인 영국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는 개신교도 세력이 충돌하며 수많은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민간인을 포함해 35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만명의 부상자, 실종자를 낳은 현대사의 크나큰 비극이다.

올해 3월에 국내에 개봉하고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자전적 영화 「벨파스트」도 이 트러블 시기의 초반을 다루고 있다. 『노 본스』의 주요 배경인 ‘아도인’이라는 마을은 가톨릭교도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곳으로, 작가 애나 번스가 실제로 나고 자란 동네이다. 번스는 부커상 수상 당시 소감에서 “나는 폭력과 불신, 피해망상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가능한 최대로 스스로 알아서 생존해야 하는 곳에서 성장했다”고 아도인을 묘사한 바 있다.

종교와 신념의 이름으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세상, 우리 편이냐 저들 편이냐 선택을 강요당하며 억압과 감시와 폭력이 일상이 된 동네에서 가장 고통 받는 건 주인공 어밀리아 같은 아이들과 여자들, 병자들, 성적 소수자들, 어느 쪽 편에도 서지 않아 나약한 인간 취급을 받는 남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래서 『노 본스』를 읽는 건 불편하고 때로는 불쾌한 경험일 수 있다. 혐오와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과 정신이 어떻게 피폐해져가고 지역 공동체가 어떻게 무너져가는지 잔인하도록 생생하고 서늘하게, 하지만 연민과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보여주는 이 소설은 독자들을 말 그대로 그 세계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멀다면 먼 과거, 우리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심각한 혐오와 편 가르기로 병들어가고 있는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에도 많은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소설가 구병모는 이 소설을 먼저 읽고 “행간에 십자포화가 쏟아진다. 충격과 비극의 여진을 수습할 틈 없이, 살과 피와 뼈를 지닌 언어가 멱살을 잡고 흔든다”고 소감을 전했고, 작가이자 서평가 금정연은 “북아일랜드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관통하는 소설이지만 배경지식은 없어도 좋다. 역사에 관심 있는 이에게는 북아일랜드의 ‘트러블’을 다룬 끝내주는 소설이,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그냥 그 자체로 끝내주는 소설이 될 테니까”라면서 “놀랍도록 우습고, 혼란스럽고, 슬프고, 두렵고, 절망적이고, 종내 아름답다”고 했다.

일상이 사투가 된 혐오와 폭력의 세계에서
소녀 어밀리아와 ‘평범한’ 이웃들이 살아가는 법

“트러블은 목요일에 시작됐다. 저녁 6시에”라고 첫 문장을 여는 이 작품은 1969년 아도인에서 처음 소요가 시작되었던 날부터 1994년 어밀리아와 친구들이 함께 모여 뉴스로 정전 협상 소식을 접하는 날까지 트러블 시기 거의 전체를 시간순으로 따라가며, 작은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을 한 장면 한 장면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형식으로 한줄기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형태가 아니라 분절된 단편들로 이루어졌다. 연작소설처럼, 각각의 장을 완결된 글로 볼 수도 있지만 또 이 이야기들이 느슨하게 연결되며 전체적인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이야기마다 중심인물이나 시점이 달라지는데 가장 많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은 어밀리아라는 여자아이다.

소설 첫 부분에서 어밀리아는 이 ‘트러블’이라는 것 때문에 앞으로 친구들과 길에 나와 놀 수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도, 길에서 못 놀 정도로 나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도무지 이해 못할 만큼 순진하고 평범한 일곱살짜리 아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트러블이 그뒤로 30년 가까이 계속되며 사람들을, 일상을 처절하게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폭력으로 가득하다. 국가의 폭력, 무장단체의 폭력, 학교 선생님들의 폭력, 학생 사이의 폭력, 가족 안에서의 폭력이 겹겹이 어밀리아의 삶을 극한으로 몰고 간다.

그런데 소설은 이런 처참하고 부조리한 폭력과 죽음의 삽화를 “모든 일이, 언제나 그렇듯, 그다음의, 새로운, 과격한 죽음에 묻혔다”라는 식의 심상한 말투로 맺으며 그다음 비극을 향해서 나아가곤 한다.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어밀리아의 심신이 섭식장애와 알코올중독을 거쳐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정신병에 이르기까지 점점 망가져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제3자가 외부에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식의 묘사와는 거리가 멀다. 번스는 실제 북아일랜드 분쟁의 생존자로서, 독자로 하여금 이 고통스러운 여정에 함께 참여하기를 요청한다. 극단적인 폭력을 그리는 건조하고 심상하고 때로 “사악하게 웃기는” 어투는 그 한복판에서 수십 년간 폭력에 익숙해지며 충격에 무뎌진 사람들의 망가진 정신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어밀리아는 “대체 사람이 장례식에 몇번이나 가야 하는 건가?”라고 자문한다. 옆집 아주머니가 죽고 심지어 자신의 아빠가 중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어도,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보라는 직장 상사의 배려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며 오히려 짜증이 솟을 만큼 무감하기만 하다.

분쟁의 한복판에서 가장 고통 받는 건 사회적 약자들
위협받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노 본스’(No Bones)라는 원제를, ‘본’(bone)이 소설에서 여러가지 중의적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그대로 음차해서 한국어판 제목으로 삼았다. 소설에서 ‘본’은 아도인에 있는 어떤 구역의 이름이기도 하고, 여러차례 등장하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라는 뜻의 숙어 ‘no bones about it’에서 가져온 말이기도 하다. 그런 한편 ‘뼈’는 이 소설에서 여자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앙상한 몸, 욕구도 희망도 없는 몸, 섹슈얼리티가 거세된 몸을 뜻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이런 신체를 추구하는 까닭은 소설에 묘사된 것과 같은 암울하고 폭압적인 사회에서 폭력이 특히 여성의 신체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밀크맨』에서 주인공이 위험한 반국가단체 지도자의 성적 관심을 받으면서 위기에 처하듯이, 『노 본스』에서도 어밀리아가 성적 폭력에 거듭 노출되고 어밀리아의 어린 시절 친구 메리 돌런이 친족 강간으로 아기를 출산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 섹슈얼리티 자체가 여성들에게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이 된다. 전쟁 상황에서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무엇보다도 쉽게 저버려진다.

어밀리아의 거식증은 여성의 신체를 함부로 침해하는 폭력 속에서 차라리 몸이 없어지기를 바라며 자기 몸과 벌이는 전쟁일지도 모른다.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는 보통 남자들을 중심으로 남자들이 주도하는 군사적 움직임을 따라 서술되는 경우가 많지만, 『노 본스』는 어밀리아를 비롯해 가장 약한 존재들이 폭력의 무게를 가장 무겁게 짊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노 본스』의 이런 주제의식과, 사뮈엘 베케트를 연상시키는 부조리함과 희비극성 등의 특징은 『밀크맨』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다. 『노 본스』의 어밀리아는 여러모로 『밀크맨』의 주인공 ‘가운데 딸’을 떠오르게 한다(어밀리아는 4남매 가운데 셋째이다). 『밀크맨』에 나오는 알약소녀나 알약소녀의 동생, 아무개 아들 아무개의 원형 같은 인물들도 볼 수 있다.

『노 본스』는 17년 뒤에 독창적 문체와 강력한 목소리를 갖춘 『밀크맨』이라는 완성도 높은 소설로 재탄생할 토대와 씨앗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노 본스』 출간을 기념해 『밀크맨』도 리커버 특별판으로 함께 펴내었다. 기존의 표지가 암울한 1~6장까지의 기조를 표현했다면, 이번 새로운 표지는 7장의 ‘빛을 내쉬는’ 순간을 담았다. 모든 고유명사가 드러나지 않아 공간적 배경이 모호했던 『밀크맨』과 달리, 『노 본스』는 작은 골목 하나까지 실제 지명으로 등장하며 역사적 맥락을 뚜렷이 드러낸다. 따라서 이 두 작품을 묶어서 읽는다면 보다 풍성한 독해가 가능할 것이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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