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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계 교수의 '프로이트, 어떻게 읽을 것인가' 비판
강영계 교수의 '프로이트, 어떻게 읽을 것인가' 비판
  • 이덕하 번역가
  • 승인 2006.01.21 00:0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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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대한 꿈해석'이란 '원제'가 나온 내력

강영계 교수는 교수신문 2006년 1월 9일자에 실린 '전문가 조언: 프로이트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프로이트에 대해 호의적으로 썼다. 나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몽땅 헛소리라고 생각하므로 이 글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할 생각이 없다. 나는 대신 이 글의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하려 한다.

강영계 교수는 글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꿈의 해석’의 원래 제목은 ‘꿈에 관한 꿈해석’ 이며…”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수수께끼가 풀렸다. 독일어판 전집 2, 3권 합본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어 있다.

Die Traumdeutung Über den Traum

이런 제목이 붙은 것은 2, 3권 합본에는 'Die Traumdeutung꿈의 해석'과 'Über den Traum꿈에 대하여'가 같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꿈에 대하여'는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간한 후인 1901년에 대중들을 위하여 쓴 '꿈의 해석'의 요약본이며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刊)에 실려 있다. 아마도 강 교수는 이것을 보고 ‘꿈에 관한 꿈해석’이라는 “원래 제목”을 생각해낸 것 같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꿈이 잠재적 꿈생각과 검열과 명백한 꿈내용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해명함으로써 인간의 역동적인 정신과정을 밝히려고 했다.”

강 교수는 “manifester Trauminhalt(manifest content of a dream, 현시된 꿈내용, 현재몽)”를 ‘명백한 꿈내용’이라고 번역했다. ‘manifest’를 ‘명백한’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manifest’는 ‘나타난’, ‘현시된’, ‘현재된’ 등을 뜻하는 말이다. ‘현시된 꿈내용’은 명백하고 뚜렷하든 흐리멍텅하고 애매하든 우리가 기억하는 꿈을 말하는 것이므로 ‘명백한’은 잘못된 번역이다.

“이러한 정신과정의 구조는 후기에 가서 그것(Id:심층의식), 초자아(Super-ego:은폐된 도덕적 양심) 및 자아(ego:합리적 자아)로 대치된다.”

강 교수는 “das Es(id, 이드)”를 “심층의식”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도 문제가 있다. 프로이트는 이드 그 자체는 의식 밖에 있다고 했다. “심층의식”이라고 하면 의식 깊숙이 있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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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보도> 위의 글 가운데 "헛소리" 등 정제되지 못한 표현은 필자의 홈페이지에 있는 글을 미처 동의를 구하지 못하고 교수신문 인터넷판에 올리는 과정에서 교정되지 못한 것입니다. 필자와 독자여러분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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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 2014-03-23 09:55:35
헛소리에 대해 지킬 예의는 없습니다.

나무 2006-02-08 20:16:45
우선 이덕하는 자기는 프로이트에 대한 해석이 강영계와 완전히 다르다. 자신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해석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겠다. 다만 다른 입장을 취하더라도 틀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논의를 하는 것이 왜 예의가 없는 것인가? 문맥도 없이 그냥 "헛소리"라는 말만 들어가면 예의 없는 것인가? 아래의 글을 쓴 사람은 예의 있다 없다를 판단한 적절한 판단력이 부족한 것 같다.

이덕하의 주관적 표현이 절제된 비판은 강영계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사실 자체로도 통렬하기에 주관적 표현이 필요없다.

강영계에게 글을 부탁했다는 것이 나는 처음부터 의아했다.

bukhak 2006-01-31 09:52:16
이진우 교수 번역 문제를 거론한 기사에 자물쇠가 걸려 있다.
자물쇠를 거는 까닭은 충분히 안다.
그러나, <출판저널>이라는 타매체에 실린 기사를 다시 게재하는
이른바, <남의 기사 다시 싣기>인데, 이런 기사에 자물쇠를 거는 까닭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교수신문에서 공들여 취재하고 분석한 기사라면 수긍할 수 있지만......

*병술년에는, 신문사와 기자, 직원들 한분하분에게 모두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michelle 2006-01-25 12:23:15
놀랍습니다. 어떤 분이 우리 사회에는 윗사람에게 굽신거리는 예절(?) 외에 동료, 친구, 시민 기타 평등한 관계에서는 예절이라는 게 부재하다는 지적을 하였는데 여기서도 그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일단 어떤 글에 대해 혹은 번역에 대해 평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평자의 예의가 있습니다. 가령 번역의 오류를 지적할 때는 '문제가 있는 부분이 많다'라는 주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디가 어떻게 문제가 있는지 어떤 부분이 치명적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나서 전체 번역의 평을 하는 게 옳습니다.여기서 사용된 '헛소리'라는 표현은 학계의 전문용어가 아닌 것을 아십니까? 인터넷 댓글에서나 사용되는 말이지요. 그것도 매우 저급한 댓글에서나... 이덕하님의 글도 문제지만 평자의 예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기사를 내보낸 교수신문에도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글은 미리 교정을 거쳐야 되는 것 아닙니까? 다음 부터는 머릿기사에서 이런 표현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