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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6] 헤세, 역사·민족·국가로부터 고독을 택하고 ‘데미안’을 쓰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6] 헤세, 역사·민족·국가로부터 고독을 택하고 ‘데미안’을 쓰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6.27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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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사진=위키미디어
헤르만 헤세. 사진=위키미디어

 

한국에서 헤르만 헤세만큼 유명한 서양 작가는 드물다. 특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명문과 함께 『데미안』 등에서 헤세는 내면의 성장에 천착한 작가를 넘어 ‘힐링의 작가’로서도 유명하다. 불안하고 고독한 청춘을 노래한 작가, 내면세계에 천착한 작가, 자아 찾기로 대표되는 치열한 내적 투쟁을 전개한 작가, 동양적인 신비를 노래한 작가, 정원을 일구며 소박한 자연으로 회귀한 작가라고 한다. 소위 ‘훌륭한’ 분들 역시 공통적으로 “헤세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심지어 “『데미안』을 읽기 전에는 부모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제대로 모르고 공부도 게을리 했는데 그 책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는 구절을 읽고 별안간 대오 각성하여 열심히 공부해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가장 빠른 나이에 장군까지 진급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받드는 정치인이 되었다”라고 말한 정치인도 있다.

그래서일까? 중고교 시절이나 대학시절 교양 필독서 목록에는 헤세의 책이 빠지는 법이 없다. 지극히 관념적인 자아 찾기, 작가의 평생을 지배했던 고독함, 개성에 대한 탐색은 어느덧 헤세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헤세는 정말 그런 작가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2017년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를 썼다. 

 

구제불능 실패자, 부모의 치욕이란 소릴 들은 헤세

헤세는 수도원 학교에 강제로 보내졌다. 그리고 학교에서 도망친 헤세는 정신병원을 거쳐 다시 새로운 학교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또 도망쳤다.
사진=위키미디어

헤세는 1877년 독일에서 태어나 1962년에 죽었다. 그를 보통 독일 작가라고 하지만, 1923년, 즉 46살부터 스위스 국적을 가지고 스위스에서 40년간 살다가 죽었으니 스위스 작가라고 봄이 옳다. 

헤세가 12살 때 시인이 되려 하자, 부모와 교사는 그를 신부나 학자로 키우고자 수도원 학교에 강제로 넣었다. 그곳에서 도망친 그는 보호시설과 정신병원을 거쳐 다시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나 역시 도망친다. 이어 서점이나 공장에서 훈련을 받지만 역시 중단한다. 그래서 구제불능, 실패자, 부모의 치욕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런 그가 학교나 교사, 심지어 부모까지도 좋아할 리 없다. 그는 학교를 다닌 8년간 스스로 감사한 교사가 단 한 사람뿐이고, 학교란 언제나 맞서 싸워야 하는 절대권력이라고 했다. 독재 절대권력이 요구하는 굴종에 대한 반항은 학교 시절부터 싹터서 그의 평생을 지배했다.

그의 교육은 우리식으로는 중2 중퇴 정도로 끝났고, 그 후에는 철저히 독학을 한다. 아니, 그 8년간에도 별로 배운 게 없고 독학을 했으니 평생 혼자 공부한 셈이다. 그는 대학 교육도 경멸했다. 그의 삶이나 문학의 원리는 스스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것과 고귀한 것을 찾아 스스로 읽고 생각하며 쓴다는 것이다. 그게 그의 고독이다. 

그것은 ‘천재’의 까닭 모를 외로움이나 알프스를 향한 향수가 아니라, 모든 권력이나 권위나 전통으로부터의 고독이다. 특히 역사나 국가, 민족이나 대중으로부터의 고독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반사회적이다. 즉, 현 사회를 부정하고 비판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헤세만큼 유토피아적 공동체나 아름다운 자연 속의 삶을 강력하게 표현한 작가도 다시없다는 점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사회적이다.

헤세의 삶은 1916년, 즉 39살을 경계로 나누어진다. 그 전까지 세상의 요구에 맞추어 어떻게 하든 모범 학생, 모범 시민이 되려고 노력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한 탓으로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자신을 되돌아본다. 정신병원에서 스스로 내린 결론은 자신이 옳았다는 것이어서 그 뒤로는 모든 도덕적 굴레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 최초의 결단이 반전론이다. 그의 반전론은 그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이제 그것은 더욱 확고해졌다. 독일이 야기한 제1·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은 물론 그 후에도 독일 사람들은 모두 전쟁에 미쳤다. 일반인들만이 아니라 예술가들도 모두 전쟁에 미쳤다. 그때 미치지 않고 전쟁에 반대한 사람이 헤세였다. 당연히 배신자니 변절자라는 비난을 들었다. 징집 기피자니, 조국 없는 놈이라니, 유태인 용병이라는 욕설까지 들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독일 문학의 가장 우아한 반항아

헤세는 전쟁을 넘어 상업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갑도 있었다. 사진=위키미디어

헤세의 반항에는 전쟁이라는 집단적 광기에 대한 반항만이 아니라, 허영과 가식, 명리 추구와 사리사욕, 상업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도 포함된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식은 물론 모든 집단, 모임, 심지어 자신의 생일잔치에도 전혀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집 앞에는 언제나 방문 사절 표지판이 붙었다. 그는 세계 방방곡곡에서 사인회를 하는 우리식 명사가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아웃사이더, 국외자, 고독인, 반항인, 유랑인, 방랑자, 자연아였다. 그에게 집단이란 천성적으로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연인이었다. 그는 평생 시골에서 시골 사람으로 살았다. 시골에 주말 별장을 가진 서울 예술가의 사치가 아니라, 헤세는 도시를 거부하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헤세의 모든 작품은, 그리고 도시를 벗어나 평생 시골에서 살았던 헤세의 생애 자체는 자연 속의 자연아 그것이었다. 그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그들과 무리지어 집단을 만드는 것은 거부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에게는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그 점에서도 그는 스스로 외로운 왕따였다. 헤세는 사회보다 개인을 중시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였다. 프루동, 슈티르너, 톨스토이처럼 헤세는 정부와 집단 사회의 거부를 촉구했다. 

돈, 권력, 성공 또는 지혜는 국가가 스스로 영속화하고 국가의 고유한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사회가 만든 함정일 뿐이라고 주장한 헤세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다룬, 특히 사회라는 체제가 개인을 억압한 우리 상황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작가로서 개인의 자살과 같은 비극을 내면 심리의 갈등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생겨난 비극으로 보았다. 그런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를 혁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이히라니츠키가 그를 “독일 문학의 가장 우직한 반항아”라고 평한 것은 정곡을 찌른 말이다.

 

자발적 왕따의 모험

헤세는 철저한 아웃사이더, 국외자, 고독인, 반항인, 유랑인, 방랑자, 자연아였다. 사진=픽사베이

내가 좋아하는 그의 초기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는 단순한 청춘의 애가가 아니다. 체제 비판 소설이다. 가정과 학교와 직장이라는 체제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어느 10대의 이야기다. 여기에 정치와 경제는 구체적인 체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10대의 생활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적인 가정, 학교, 직장은 이미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전제한다. 

『페터 카멘친트』가 에콜로지의 교과서라면 『수레바퀴 아래서』는 반학교의 교과서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반(反)학교의 교과서다. 또한 『데미안』은 절대적인 정직을 통한 자아의 규명과 자기 길의 발견, 그리고 자율적인 존재로서의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주장한 새로운 왕따의 이야기다. 헤세를 흔히 서양 작가 중에서 가장 동양적이고 우리 조상을 대하는 것 같다고 하지만, 그 대표작인 『싯다르타』는 부모를 떠나고 어떤 스승도 따르지 않는 왕따일 뿐이다. 『황야의 이리』도 배부르고 자만하는 소시민 사회이자 기계만능의 합리주의 사회인 황야에서 우짖는 이리의 모습으로 더욱더 새로운 왕따를 보여준다. 

이제 그 왕따는 전쟁과 과학, 금전 도취, 국수주의 등에 대한 절망을 거쳐 자아와 만나기 위해 지옥을 여행한다. 그래서 열정, 부도덕, 방황, 허무주의, 자살에 이르는 구토감을 경험한다. 그리고 『유리알 유희』는 집단이 아닌 왕따 개인을 중시하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보여준다. 1954년 77살의 헤세는 말했다. 자신의 작품들은 모두 개성의, 또는 개인의 옹호 또는 절규라고. 나는 그것을 자발적 왕따의 정신적 모험이라고 바꾸어 이해한다. 여하튼 개인의 옹호는 그의 문학만이 아니라 삶의 기본이었다. 자기 존재를 통해 그는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삶의 불멸성을 보여주었다.

헤세는 자신을 또는 그 누구도 모범으로 살지 말라고 끝없이 경고한다. 사진=픽사베이

부모든, 교사든, 언론인이든, 예술가든, 지식인이든, 그 누구든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 개성을 키워주는 일이라고 헤세는 말한다. 그 어떤 정치 슬로건이 아니라, 홀로 바르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발적 왕따를 키우는 일이다. 물론 그 개성은 결국 그 개인에 의해 찾아지는 것이지 누구도 그 개성을 대신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누구도 누구의 모델이 될 수 없다. 

헤세는 자신을, 또는 다른 그 누구도 모범으로 살지 말라고 끝없이 경고한다.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헤세의 모습이 바로 그 점이다. 헤세는 힐링의 묘수를 전파했던 천재 소설가가 아니라 개인을 억압하고 개성을 말살하는 체제악에 맞섰던 반항아였다. 헤세가 말하는 자아 찾기란 대중이라는 기계의 일부로 타락하지 말고 그 기계의 현실에 저항하라는 것이다. 헤세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다룬, 특히 사회라는 체제가 개인을 억압한 우리 상황을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작가로서 개인의 자살과 같은 비극을 내면 심리의 갈등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 때문에 생겨난 비극으로 보았다. 

그런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를 혁명해야 한다고 주장한 헤세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아나키스트였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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