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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드로, 배우를 중심에 둔 극이론을 주장하다
디드로, 배우를 중심에 둔 극이론을 주장하다
  • 이승건
  • 승인 2022.07.0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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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_『배우에 관한 역설』 드니 디드로 지음 | 주미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51쪽

감성은 위대한 예술적 천재의 자질 아냐
위대한 배우는 냉정하고 침착한 관찰자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인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는 자신이 편집한 『백과전서』를 포함해서 철학, 정치학, 의학, 생물학 그리고 회화, 음악, 시, 소설, 연극 등 예술의 개별 장르에 관심을 두고 백화요란(百花燎亂)한 업적을 남긴 유일한 근대 문필가일 듯하다. 특히 바로 직전 17세기 프랑스 고전극 작가들(코르네유(1606~1684), 몰리에르(1622~1673), 라신(1639~1699))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전범(典範)으로 삼아 그 권위 아래 활동한 것과는 달리, 배우를 중심에 둔 자신만의 극이론을 펼친 매우 귀중한 자료 『배우에 관한 역설』(Paradoxe sur le comédien)을 남겼다. 만년 저작에 속하는 이 글은 연극에 관한 그의 이전 글(『사생아에 관한 대담』과 『극시론』)에서의 주장(당시에 유행하던 웅변적이고 과장된 상투적인 낭독법 대신에 몸동작 표현에 중점을 둔 배우가 느끼는 대로 연기하는 팬터마임을 권장)과는 사뭇 다른 입장을 취함으로 해서,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에 이르기까지 디드로식(Diderotesque) 연극론을 논하는 자리라면 어디서나 언급되는 저서 중 하나이다.  

 

감성은 위대한 예술적 천재의 자질이 아니다

디드로의 연기론으로 알려진 이 책 『배우에 관한 역설』은 원래 배우 안토니오 스티코티(Antonio Sticoti)가 1769년 파리 라콩브(Lacombe) 출판사에서 영어본을 번역해서 낸 『개릭 혹은 영국 배우들, 극예술과 공연예술,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성찰이 담긴 책』(Garrick ou les acteurs anglais, ouvrage contenant des réflexions sur l’art dramatique, sur l’art de la représentation et le jeu des acteurs, traduit de l’anglais)에 대해, 디드로가 서평을 작성하여 유럽 각국의 귀족들에게 돌려 읽히던 『문예통신』에 두 차례(1770년 10월15일, 11월1일)에 걸쳐 나누어 실었던 글로(7쪽, 각주2), 이후 네 번에 걸친 수정과 확장을 통해 처음 10쪽 분량보다 세 배 이상 늘어난 대화 형식(화자1, 화자2)으로 다듬어진 후(1773년과 1777년) 사후(1830년)에 첫 출간되었다. 

 

2001년 1판1쇄를 거쳐 2017년까지 1판5쇄를 거듭하며 2021년 2판1쇄를 기록하고 있는 번역본(드니 디드로 지음, 주미사 옮김, 『배우에 관한 역설』, 문학과지성사, 2021) 표지.

그는 이 책이 ‘훌륭한 배우의 첫째가는 자질’에 관한 것임을 먼저 밝힌다. 즉 ‘배우는 냉정하고 침착한 관찰자’여야 한다는 것이다(13쪽). 특히 ‘감성은 위대한 천재의 자질이 거의 못 된다’면서(21쪽), 위대한 시인이나 위대한 배우 그리고 아마도 위대한 자연의 모방자들은 누구든 아름다운 상상력과 위대한 판단력과 섬세한 촉각을 가졌으면서도 ‘또한 가장 덜 감성적인 사람들’이라고 강조한다(20쪽). 더 나아가 훌륭한 배우는 ‘인간 본성에 대한 사색과 연구를 거듭’하며, ‘이상적 모델(modèle idéal)에 따라 꾸준히 모방’하고 상상력과 기억력으로 늘 한결같이 완벽한 연기를 해 낸다고 한다(15쪽). 다시 말해, 예술창작은 가치론적으로는 이상적이면서도 존재론적으로는 현상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술가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모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미학적 주장을 펼친 것이다. 이점은 동시대 미학자 바뙤(C. Batteux, 1713~1780)의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에 대한 강한 거부의 표현으로 디드로 자신만의 미메시스 미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디드로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의 ‘역설’이라 말한 것일까? 이 책보다 두 달 앞서 씌어진 『달랑베르의 꿈』에서 말한 ‘횡경막의 뜻대로 지배되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대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디드로에게 있어서 배우란 두 개의 상반되는 기관인 뇌(이성)와 횡경막(감성) 사이에서 요동치는 특수한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특히 훌륭한 배우는 ‘두뇌와 감성의 시스템이라는 대조되는 구조 속에 사는 존재이며, 이 역설적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옮긴이의 말, 133쪽). 전통적으로 감수성은 예술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질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디드로는 “극도의 감성은 시시한 배우들을 만든다. 시시한 감성은 형편없는 배우들을 늘린다. 뛰어난 배우를 만드는 것은 감성의 전적인 결여이다”라고 주장한다(26쪽). 이와 같은 감성에 디드로의 주장이 바로 배우의 ‘역설’인 것이다. 

 

뮈토스에서 에토스로!

서양의 연극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비극의 6요소(mythos, ethos, dianoia, melos, opsis, lexis) 중 첫 번째 것인 뮈토스(플롯)를 꽤 오랜 기간 연극의 중심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18세기 시대 상황에 어울리는 희곡도 쓰고(최초의 희곡으로 『사생아』와 그 부록인 『사생아에 대한 대담』(1757년 간행) 및 『가장』(1758년 간행) 등) 그것들을 상연했을 만큼 이 방면에서 활동적인 창작자이자 이론가였던 디드로에게 뮈토스는 더 이상 연극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뮈토스로부터 에토스(배우)에로의 연극에서의 무게 중심 이동이 서평자에겐 ‘연극의 역설’로 읽힌다. 그의 『배우에 관한 역설』이 연극에서의 무게 중심을 이동시킨 연극미학의 내용을 담고 있기에,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후 더 많은 연기론 탄생에 기여했기에, 이 책으로 말미암아 서양의 연극은 더 풍요로운 지대를 형성시켜 나갈 수 있었다고 하겠다. 

 

『배우에 관한 역설』 번역본은 인문학 번역서로선 보기 드문 이력을 소유한 듯하다. 2001년 제1판 제1쇄를 시작으로 2017년 제1판 제5쇄를 펴낸 후 2021년 제2판 제1쇄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그만큼 연극을 사랑하는 우리말 독자들이 이 책과 디드로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런 독자들에게 “매우 확실한 취향을 가졌으면서”(20쪽)에서의 ‘취향’은 18세기 당시에 전적으로 미의 지각만을 위해 일하는 특정 능력에 대한 개념인 ‘취미’(프: goût, 영: taste, 독: Geschmack)로 읽혔으면 한다. 왜냐하면 디드로를 포함한 당시 철학자, 심리학자, 더욱이 미술가, 문필가 등 광범위한 지식층들이 이 개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미의 직관적 지각을 위한 주관의 능력을 취미라 부른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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