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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익 추구의 장으로 전락한 현실, 거시 담론만 무성하다
사익 추구의 장으로 전락한 현실, 거시 담론만 무성하다
  • 김명수
  • 승인 2022.06.29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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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구자대회 16 사인들의 각축장이 된 한국사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교수신문>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연재를 시작하며: 새 세대 한국 인문사회 연구자를 만난다

 

한국의 사회(과)학이 기대고 있는 개념이나 이론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활용되고 있는가. 
한국적 시민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한 제약이 나타나는지를 시민들의 생활 조건으로부터 해명하는 연구는 드물다.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신자유주의의 엄포가 쉽게 받아들여지는 시절은 지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또는 ‘사회적인 것’)가 만들어지리라는 기대도 별로 없다. 양보와 타협은 고사하고 소통이나 공감조차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만연해있다. 공공성은 기대치 않으니 최소한의 ‘공정한 경쟁’이나마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는 바람이 오히려 널리 퍼져 있다.

개개인의 절절한 사연과 경험에 바탕을 둔, 나름대로는 그럴 법한 이유도 있는 아우성들 속에서 우리 사회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사적 투쟁의 장으로 변했다. 한국인들의 일상은 사회 재생산을 둘러싼 사적 경쟁과 충돌로 얼룩져 있고, 사인(私人)들의 각축장이 된 생활세계가 연대와 통합의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는 우려 또한 적지 않다.

각축하는 사인들의 세계, 어떻게 설명해왔던가?

물론, 이 같은 진단 자체는 결코 새삼스럽지 않다. 이를 문제 삼는 연구들도 종종 있었다. 개중에는 의미 있는 통찰과 시사를 주는 논의들도 있었다. 거칠게나마 정리한다면, 그러한 작업은 대개 다음의 두 갈래 중 하나에 속한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사익 추구의 장으로 전락한 현실을 우리 사회를 틀 지우는 거시 구조나 레짐의 특성, 또는 그 변동에서 비롯된 결과로 해석하는 설명들이 존재한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론’일 것이다. 이 이론은 생활세계에서 터져 나오는 문제들을 사회경제적 시민권의 제약이라는 현상으로 요약하면서, 노동 대표성을 결여한 보수 정당 체제의 공고화라는 정치변동의 특성에서 그러한 지체가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인지에 관해 판단이 엇갈리고, 체제를 조직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일관된 합의는 없긴 하지만, ‘87년 체제’니 ‘97년 체제’니 하는 일련의 체제론들 역시 이에 속한다. ‘사회’를 해체하는 거대 기표로서 신자유주의에 책임을 돌리는 비판들도 같은 부류로 볼 수 있다.

좀 더 작은 중범위 수준으로 내려가면 중요한 비교 사회적 성찰을 주는 논의들이 더러 있다. 중산층의 삶을 희구하는 노동운동의 흐름을 분절 고용체제나 기업별 노조 체제라는 맥락 속에서 해명하거나, ‘작은 복지국가’와 같은 비교 유형론적 범주를 통해 사적 생계의 구성에 관한 시사를 주는 논의들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사적 경쟁에 몰두하는 특정 주체나 그들의 행위에 주목하는 시선이 있다. 이러한 주체들은 관점과 상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그들의 속성(주체성)이나 행동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되어 왔다. 몇 가지만 소개해 보자.

가령, 현대화로 맞부닥친 생존 강박 속에서 체화한 한국인들 특유의 심성을 중심으로 이들의 행위 양식이나 삶의 풍경을 서술하는 논의가 있다. ‘투기꾼’이나 ‘중산층’과 같은 고립된 존재들로 주체를 규정한 다음, 사회적 지위나 부, 위신을 좇는 그들의 욕구가 발현된 결과로 현실을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사회의 자원을 갈취하는 기생적 특권집단에 대한 힐난도 그 연장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쪽에는 ‘신자유주의화’나 ‘금융화’로 대표되는 구조변동과 더불어 탄생한 주체성의 문제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금융자본주의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포획된 것이든, 아니면 자기 규율적인 합리적 실천가로 변모(가령, ‘투자자 주체’)해 시류에 편승한 것이든, 그러한 주체들을 현재의 긴장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나 동조자로서 지목하는 생각이다.

한국적 시민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한 제약이 나타나는지를 시민들의 생활 조건으로부터 해명하는 연구는 드물다. 사진=jtbc뉴스룸 캡처

‘만인의 투쟁’을 해명하는 출발점, ‘주택을 통한 사적 생계’

지배나 권력이 ‘사회’를 대상으로, 공통성으로 묶이기 힘든 이질적이고 파편화된 개인이나 집단들의 존재를 조건으로 작동한다고 할 때, ‘만인의 투쟁’ 상황처럼 보이는 한국사회의 현실은 지배나 통치가 관철되기에 유리한 토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안정된 지배가 성립하기 어려움을 가리키는 증거이기도 하다. 통치성과 헤게모니의 구성과 작동, 그 균열과 저항이라는 고전적인 사회(과)학적 주제, 정치사회학의 고유한 질문들이 번창하기에 적합한 현실적 조건을 우리 사회는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앞서 소개한 성찰들을 비롯한 많은 논의가 이러한 현실을 조명하는 통찰을 제각기 제공해왔다. 그러한 통찰들은 필자와 같은 후학들의 학문적 성장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회적 쟁투와 균열을 일으키는 핵심 대상이나 당사자들이 갈등을 빚는 이유에 대한 규명은 정작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

거시 구조나 레짐을 강조하는 논의들은 일상의 삶에서 벌어지는 쟁투와 별 관련 없는 어떤 ‘외재하는 원인’(또는 배경적 맥락)을 내세우면서 분석을 대신하곤 했다. 설명이 필요한 개념이 만능의 설명 기표로 등장하는 일도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대표적이었다. 행위자에 주목한 때에도 타자 또는 사회로부터 절연된 주체들이 가진 욕망의 분출이나 외부 충격에 대한 반응 정도로 다루는 경우가 잦았다. 

결국, 관건은 사생활의 영역에서 극심한 사적 경쟁이 펼쳐지는 이유와 그 쟁투의 기제를 포착할 수 있는 설명 대상과 분석 단위를 발견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개인과 가족이라는 미시 주체들의 생활 조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 재생산을 둘러싼 사적 투쟁에서 특권적인 대상이 되는 특별한 ‘소재’를 찾는 게 중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주택, 더 정확히는 자가소유권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사적 생계의 구성에 주목했다. 사회관계에서 단절된 고립된 주체에 집중하거나 거시 구조의 특성으로 현상을 재단하는 데서 벗어나, 미시 주체들이 겪는 삶의 필요와 이에 관련된 사회구조 및 제도를 세력 관계의 지형이라는 정세적 맥락 위에서 묶어내는 전략이 필요했다. 이러한 종합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 항으로 판단한 게 바로 자가소유권이었다. 

길고 지루한 학습과 그 일부로서의 시행착오는 당연히 감수해야 했다. 종합부동산세의 조세정치를 다뤘던 탐색적 연구에서 얻은 발견이 그나마 길잡이가 됐다. 내 집에 기댄 생계방식의 형성과 변형을 탐구하기 위해 그 구성적 조건이 되는 거시 경제정책과 주택(부동산) 정책, 공급구조, 금융·조세·재정 등과 연관된 제도적 질서, 주거실천 및 시장 행동의 양상, 주거 운동의 전개 등도 아울러 검토했다. 정부 기록문서와 미시 가계조사 자료, 운동 사료와 시장지표를 살펴보면서 조각난 현실의 편린들을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자가 소유를 통한 사적 재생산 방식의 기원과 이를 만들어낸 구조 역사적 맥락, 그러한 삶이 유발하는 사회정치적 효과를 밝힌 박사학위논문이 이 과정 끝에 탄생했다. 

현실 ‘도피처’로서의 이론? 분석적 엄밀함이 ‘비판’의 무기

길지 않은 그러나 (앞선 세대 연구자들이 비슷한 학계 위치에 올라선 시점과 견준다면) 짧다고도 할 수 없는 개인의 연구사에서 통감했던 질문이 하나 있다. ‘한국의 사회(과)학이 기대고 있는 개념이나 이론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활용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었다.

사회적 현실을 통찰함으로써 뚜렷한 학술적 자취를 남긴 연구들도 적지 않지만, 그 반대편에는 오랫동안 논의되긴 했지만 제대로 된 분석이나 해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영역이나 주제들도 제법 많다. 너무나 익숙하게 거론되는 주제여서 다 밝혀졌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근간이 되는 내용이 설명되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경우가 상당하다. 

말머리의 이야기를 가져와 보자. 한국적 시민성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러한 제약이 나타나는지를 시민들의 생활 조건으로부터 해명하는 연구는 드물다. 현대화 과정에 대한 탐구 역시 다 다뤄졌다는 인상을 주지만, 개발독재 체제나 성장을 위한 사회동원에 관한 탐구를 넘어 20세기적 현대성의 근간이 되는 생활양식의 정착에 관한 설명은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근래의 학문적 풍토를 기준으로 본다면, 현대 한국 사회를 구조화하는 가장 큰 변화의 동인은 ‘신자유주의’(또는 ‘금융화’)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내 논의들은 이 변화를 서구사회의 특정 시기를 모델로 형성된 일반적 ‘공리’나 자본주의 재조직의 ‘법칙’이 한국 사회라는 현실에 그대로 관철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곤 했다.

이와 달리, 특정한 제도적 영역이나 생활세계의 수준에서 ‘신자유주의’(또는 ‘금융화’)가 작동하는 양태나 그 기제, 이로부터 출현하는 사회적 과정이나 관계의 특수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설명되지 않은 개념이나 이론을 부단히 전제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설명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엄정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분석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설명이 현실의 삶의 세계와 주체들에 대한 유력한 해석과 비판의 준거로 활용될 때, 얼마나 많은 가상적 판단과 왜곡을 만들어낼지를 되물을 필요가 있다. 

필자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은 늘 두렵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어 언제나 다가서기 힘들다. 현실이라는 삶의 세계뿐 아니라 그 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또한 가늠하기 어려워 학자로서 무력감에 빠질 때가 많다.

필자 나름대로는 미시 주체들의 생활 조건과 행위 양식의 변화에 준거를 두고 현재의 사회문제를 설명하려 했지만, 앞서 지적했던 문제들에서 자유롭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비판이 의지할 것은 오직 분석의 엄밀함뿐이라고 생각한다. 

김명수 전남대 사회학과 조교수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사회가 겪은 사회변동을 미시 주체들의 생활조건과 행위양식의 변화라는 맥락에서 연구해왔으며, 일상생활의 조직을 통해 권력의 구성(작동)을 밝히는 데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중산층 생활양식의 형성과 변형, 개발재정체제의 형성, 디지털자본주의와 금융, 금융투자문화 등을 주제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내 집에 갇힌 사회: 생존과 투기 사이에서』(2020)와 『세계화와 사회변동』(공저, 근간)이 있다. 최근 발표한 대표 논문으로 「발전주의는 언제 일상이 되었는가?」, 「박정희 정권의 사회 개입과 유예된 현대」, 「가계금융화의 굴절과 금융 불평등」, 「자가소유권의 기능 전환과 중산층의 변화」 등이 있다. 앞서 출간한 책이 문화체육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학술 부문 세종도서(2020)로 선정된 바 있다. 비판사회학회 김진균학술상(2021)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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