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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벤치, 공원 디자인을 완성하다
[디자인 파노라마] 벤치, 공원 디자인을 완성하다
  • 조경진
  • 승인 2022.06.24 10: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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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㉒ 조경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
대모산 숲속 야생화원 벤치. 사진=조경진
대모산 숲속 야생화원 벤치. 사진=조경진

우리 동네 숲 자락의 야생화원과 자락길은 늘 주민들 발길로 붐빈다. 그중 향기 정원은 내가 자주 찾는 치유 공간이다. 비염으로 후각이 둔감해진 까닭에 이곳에서 식물 향기를 맡다 보면 어느새 조금은 예민해지는 변화를 체감한다. 최근에는 꿀풀, 백리향, 톱풀들이 나의 치유 식물이고, 마주한 벤치가 나의 치유 공간이다. 공원 벤치는 사람들이 머물렀으면 하는 곳에 놓인다. 저녁녘 주민들이 산책할 때 벤치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는 일은 즐겁다. 홀로 있건 가족과 함께 있건 벤치에서 머무는 시간은 한가롭고 평화롭다. 공원 벤치는 산책이라는 여정에 잠시간의 쉼표를 제공한다. ‘공원 벤치’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노래 제목에 유독 많이 등장한다. 노래 가사까지 포함하면 더 많다. 공원이라는 가사가 등장하면 늘 따라 벤치가 나온다. 공원 벤치가 그만큼 사람들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일 것이다.

공원 벤치는 흔히 사소한 디자인 요소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벤치를 어느 장소에 놓는가는 무척 중요한 결정이다. 벤치는 공간 경험의 과정에서 단락이 마무리될 때 놓인다. 걷다가 쉬면서 템포를 조절한다. 쉬면서 앉아 있으면 풍경을 본다.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마주하는 내면으로 침잠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걷다가 머물고, 주변을 재인식하고, 잠시 세상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통하여 짧은 일상의 탈출을 경험한다. 벤치는 공원 디자인을 완성하는 도구다.

 

블로델 리저브 숲속 정원 벤치에서 본 풍경. 사진=조경진

공원 벤치의 이중적 성격

정원이론가 히르시펠트(C.C.L.Hirschfeld)는 『정원예술의 이론』(1780)에서 벤치의 의미에 설명했다. “좋은 전망이 있는 곳에서는 쉬는 장소를 마련하고, 식재를 통하여 최대한 효과를 발휘하게 해 최선의 조망을 제공한다. 벤치가 어떠한 생각으로 배치되었는가를 파악하는 일은 흥미롭다.” 그는 벤치는 하나의 사인이나 제스처이자, 표시이자 지시라고 표현하고 있다. 벤치가 디자인의 의도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시애틀 인근 베인브리지(Bainbrige) 섬의 블로델 리저브(Bloedel Reserve)라는 숲이 있다. 이곳은 삼림 목재 기업을 한 블로델의 개인 별장을 공익 재단에 기부한 곳이다. 숲 전체는 보존하면서 일부 공간으로 이끼 정원, 일본 정원으로 조성하였고, 이후 조경가 리처드 하그(Richard Haag)가 보완 설계했다. 이곳을 걷다 보면 벤치가 무척 절제되어 놓인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블로델 부부가 살던 집은 이전 그대로 남아있다. 바다가 보이는 집 앞 벤치에 앉으면, 부부가 늘 바라보던 바다 풍경에 공감하게 된다. 이어서 숲속에는 하그가 설계한 반영 정원(Reflection Garden)이 있다. 직사각형 형태의 울타리가 둘러싸고 있는 호수 공간의 양 끝에는 벤치가 하나씩 있다. 여기 벤치에 앉아 있다 보면 숲과 하늘에 보이며 내면의 평정을 느끼게 된다. 설계가가 방문객에게 경험하게 하는 의도는 벤치에서 가장 잘 표현되고 전달된다.

공원 벤치는 현대 생활에 필요한 고독과 공동체 감각 모두를 경험하는 공간이다. 벤치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가족과 친구와 담소하고, 때로는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한다. 조경가 로리 올린(Laurie Olin)은 『앉으세요(Be Seated)』(2017)에서 공공 공간의 벤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개인적 공간 경험을 잘 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시민으로서 장소와 커뮤니티에서 역할을 잘 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개인 시민과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시민, 둘 다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가 설계한 두 공간의 벤치는 서로 다른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하나는 콜럼버스 서클(Columbus Circle)의 벤치다. 센트럴파크 남서쪽 교통섬에는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동상이 있다. 올린은 이 공간을 재설계하면서 동상 기단에는 대리석 계단이 자연스러운 벤치가 되게 하였고, 동상 중심으로 외곽에는 식재 공간, 중간에는 분수대, 안쪽에는 대리석 원형 벤치를 디자인했다. 자동차가 늘 번잡한 공간에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게 되고, 주변 사람들과 긴 벤치를 함께 사용하게 된다. 이 공간에 앉아 있다 보면 주민이건 관광객이든 함께 있는 느슨한 공동체성을 느끼게 되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거나 접촉할 가능성은 커진다.

룩셈부르크 공원(왼쪽)과 브라이언트 파크(오른쪽)의 벤치. 사진=조경진
룩셈부르크 공원(왼쪽)과 브라이언트 파크(오른쪽)의 벤치. 사진=조경진

다른 사례는 뉴욕의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다. 1990년대에 리모델링한 공원 디자인은 원래 장소성을 살리면서 디자인 요소 하나하나에 공을 들였다. 난간, 분수, 벤치 등은 유럽식 디자인을 본떠 설계했다. 벤치는 파리 룩셈부르크 공원의 이동식 철제에서 착안하였다고 한다. 룩셈부르크 공원의 벤치는 잔디밭 주변 길가에 사람들이 가져다 자유롭게 놓을 수 있다. 이동식 벤치는 늘 다른 풍경 만들어 주는 도구가 된다. 브라이언트 파크의 이동식 벤치는 룩셈부르크 공원보다 슬림하고 가벼운 철제 벤치다. 벤치는 공원 길이나 잔디밭에 자유롭게 놓인다. 점심시간에는 혼자 샌드위치 먹는 공간이 되거나 하고, 혼자 두 개의 벤치로 발 펴고 쉬거나, 두세 명의 동반자들과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동식 벤치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 노트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보고 있으면, 이 공원이 여럿이 함께 있으나 혼자만이 자유가 침해받지 않고자 하는 현대 도시인의 속성을 잘 수용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이동식 벤치는 텐트처럼 일시적 공간 연출의 장치가 된다. 

 

그룹 방탄소년단(BTS) 팬들이 후원한 벤치. 벤치에 적힌 문구 ‘우리가 함께라면 사막도 바다가 돼’는 2017년 BTS 콘서트 당시 팬들이 이벤트 슬로건으로 제작해 BTS에게 선물한 문구다. 사진=서울그린트러스트

시민이 만드는 나만의 공원 벤치

공원 벤치는 때로는 개인의 서사를 전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센트럴파크는 1980년부터 ‘컨서번시(Conservancy)’라는 민간단체에서 운영해 왔다. 기금을 모으는 방법으로 벤치에 1만 달러를 내고 입양하게 된다. 벤치에 원하는 글이나 메시지를 새겨 넣을 수 있다. 현재 센트럴파크에는 1만 개의 벤치가 있다고 한다. 이 중 7천여 개의 벤치를 입양하였다고 한다. 이 벤치에는 원하는 메시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문구가 담겨 있다. 여기에 담긴 메시지를 읽는 것만으로 도시의 스토리를 만나게 된다. 서울그린트러스트가 한동안 서울숲을 운영하면서 벤치 입양을 시도했다. 지금도 서울숲에 팬들이 입양해 가꾼 벤치와 정원들이 있다. BTS와 임영웅 등의 벤치와 정원을 만날 수 있다. 공원 벤치는 스토리를 만들고, 사람과 사람들이 소통하는 장치도 되기도 한다.

코로나19 이후 공원 벤치는 도시 사회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각자 동네 숲과 공원에는 여러 벤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자주 찾는 벤치를 만들어보자. 자주 찾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향기 나는 식물이 있든지, 마주하는 풍경이 맘에 들든지, 아니면 특별한 추억이 있든지. 그 공원 벤치가 나만의 숨어 있는 안식처가 될지도 모른다.

 

조경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서울식물원 총괄계획가(MP)로 일했다. 공공부문이나 비영리부문에서 도시 공원과 공공 공간 정책 자문과 기획하는 일을 했다. 도시 공원과 공공 공간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가치창출에 연구 관심을 두고 있다. 저서로는 『정원을 말하다』(나무도시, 2013)(역서) 등 다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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