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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주목한다] 『마이클 조던, 나이키, 지구 자본주의』( 월터 레이피버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이책을주목한다] 『마이클 조던, 나이키, 지구 자본주의』( 월터 레이피버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7.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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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7-10 17:45:38

마이클 조던. 그는 스포츠 스타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긁어모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농구계를 떠난 99년까지만 해도 전세계 인구의 5분의 3이 적어도 1주일에 한번은 NBA 농구경기나 TV광고를 통해 그의 모습을 지켜봤을 만큼 ‘전지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20세기 후반의 ‘지구문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월터 레이피버가 쓴 ‘마이클 조던, 나이키, 지구 자본주의’는 마이클 조던이란 아이콘을 통해 20세기 후반의 ‘지구자본주의’와 ‘지구문화’를 비판적으로 조망한 일종의 ‘문화비평서’다.

사실 조던과 나이키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 역시 할 말이 많다. 조던을 둘러싼 시시콜콜한 얘기들이라면 우리의 10대들도 미국의 10대들 못지 않게 많이 알고 있다. 그가 내기골프와 카드놀이 때문에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협찬사인 나이키사를 위해 올림픽 시상대에서 대표팀이 입기로 되어있던 경쟁사의 운동복을 거부했다는 사실까지도. 나이키에 대해서도 오죽 할 말들이 많은가. 나이키를 사달라며 부모에게 떼쓰다 ‘먼지나게’ 얻어맞은 일이며, 하교길 후미진 뒷골목에서 ‘삥’ 뜯기던 어둔 기억들. 이 책은 20년전 우리의 일상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작동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루되어 있었는지를 역설하는 듯하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조던의 이미지와 나이키가 손잡고 세계시장을 잠식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테크놀러지의 영향이다. 1992년, 조던의 미국 농구대표팀(드림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일이다. 한 미국인 기자가 던진 질문이 화제가 됐다. “조던, 당신은 신인가?” 스물아홉살의 농구 황제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농구경기를 할 뿐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유럽인들은 이것이 단지 미국스런 허풍과 황색저널의 스노비즘의 표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황색기자’의 질문이 하나의 진실을 포착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이클 조던이 광고와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테크놀러지가 결합된 스포츠마케팅 분야에서만큼은 빌 클린턴보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위대하다는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랬다. 그는 신이었다. 그를 천국으로 호명한 것이 CNN의 위성 네트워크였다면, 그를 위해 지상의 천년왕국을 준비한 것은 나이키사의 농구화 ‘에어조던’이었다. 불세출의 스포츠 스타와 초국적 기업, 그리고 미디어 재벌의 만남. ‘지구 자본주의’란 이름의 새로운 세계종교를 지탱한 것은 다름 아닌 이들의 ‘新삼위일체’였다.

하지만 이들이 세계를 상대로 팔아치운 것은 한 켤레에 100달러 남짓한 나이키 운동화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란 나이키사의 구호가 상징하는 미국식 라이프 스타일이었다. 따라서 저자가 볼 때 조던과 나이키는 “냉전 이후 미국문화, 미국의 마케팅, 미국의 부, 미국에 본부를 둔 미디어, 미국에 근거한 초국적 기업의 상징”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테크놀로지, 특히 케이블과 위성에 기반을 둔 미디어 테크놀러지였다.

여기까지만 두고 본다면 저자의 주장은 테크놀로지의 변화를 보다 중요한 변수로 간주한다는 점이 다를 뿐, 60년대부터 서구의 비판적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어온 문화 제국주의론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다만 21세기의 세계가 미국의 경제적/문화적 패권의 강화로 귀착될 것이라 예단하지 않는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전지구적 상호작용의 심화가 미국패권에 대한 저항운동 역시 강화하게 되리라는 주장이 그렇다. 하지만 그의 논거는 단순하다. 조던을 예수 그리스도보다 유명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의 빈약한 정치의식과 무절제한 도박벽을 폭로해 곤경에 빠뜨린 것도 미디어였고, 막대한 광고료의 대가로 나이키에 떼돈을 벌게 해주었지만 제3세계에서 행해지는 나이키의 노동착취 실태를 보도해 막대한 정치적/경제적 타격을 입힌 것도 미디어였다는 것이다. 자칫 미디어의 도구적/기술적 가치중립성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으로 오해받을 만하다. 투기꾼 조지 소로스를 “사려 깊은 전지구적 자본가 중 한 명”으로 평가하는 것도 그다지 사려 깊은 발언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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