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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연 화합의 결과물…‘무아’가 진정한 자유
나는 인연 화합의 결과물…‘무아’가 진정한 자유
  • 김재호
  • 승인 2022.06.24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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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자유와 이성’ ⑨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9를 맞이해 「자유와 이성」을 주제로 총 44회 강연을 시작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본성, 재난과 질병에 대한 제약과 해방 등을 역사, 정치, 철학, 과학기술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살펴본다. 지난달 28일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철학과)가 「분별심으로부터의 자유: 불교의 깨달음과 해탈」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10강은 이승환 고려대 명예교수(철학)의 「도가의 자유관」, 제11강은 장동진 연세대 명예교수(정치사상)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역사와 전개」,, 제12강은 박찬표 목포대 교수(정치언론홍보학과)의 「자유, 공화주의, 다원주의」, 제13강은 박수형 서울특별시의회 입법조서관의 「자유주의의 변용: 역사와 사회적 맥락」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일체 관계를 탈각하고 자타 분별이 없는 나
충동·분노·번뇌에 이끌리면 꼭두각시에 불과

 

불교에 많이 등장하는 개념이 무애(無碍) 자재(自在)이다. 물리적 사물[색]에서 자유로운 것을 ‘색자재(色自在)’, 심리 활동에서 자유로운 것을 ‘심자재(心自在)’라고 하고, 일체 장애를 벗어난 무애(無礙), 대자유의 경지를 ‘열반’이라고 부른다. 불교에 등장하는 또 다른 개념은 평등성지(平等性智)이다. 자아에의 집착(아집)을 벗으면서 얻게 되는 지혜를 만인의 평등한 성품에 대한 지혜인 평등성지라고 한다.

인간은 자유주의가 생각하듯 타존재와의 일체 관계성을 탈각한 채 자기 욕망만 충족시키면 되는 그런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동체주의가 생각하듯 타존재와의 상호 의존 관계에 얽매인 채 공동체적 질서에 의해 삶의 방식을 규정받는 그런 존재도 아니다. 

불교는 개인주의도 공동체주의도 아니고,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개체적 본성인 자연도 사회적 관계인 인연도 아니다. 불교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둘을 모두 넘어서는 제3의 관점을 제시한다.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자유주의(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자연과 인연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가는 불교는 과연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 어떤 자유를 말하는가?

 

한자경 이화여대 교수(철학과)는 표층의 자아가 무아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불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자유주의(개인주의)와 구분된다. 첫째, 불교는 기본적으로 ‘무아(無我)’를 주장하며, 남과 구별되는 개별적 자아, 개체적 본질을 갖는 자아, ‘나는 나다’라고 생각되는 개별적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한다. 둘째, 불교는 인간의 욕망을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본질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을 구속하는 강제로 간주한다. 사회적인 외적 강제뿐 아니라 내면의 욕망도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내적 장애로 여기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라고 여기는 실체적 자아, 일체 관계를 탈각한 나, 자타 분별의 나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개인적 나 안에 나라고 할 만한 본질,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나로 여기면서 집착하는 나, 일상의 나는 개별적 실체로서의 나가 아니고 여러 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형성된 것, 인연 화합의 결과물일 뿐이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 파도치는 바다 위의 돛단배처럼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뿐, 배 안에 키를 쥔 선장으로서의 자아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 무아설이 뜻하는 바다. 무아설만 보면 인간은 인연의 끈을 따라 흔들거리는 꼭두각시와 다를 바가 없다. 흔들리는 배 안에 키를 쥔 선장으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개별적 실체성을 부정하고, 인간을 인연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인연 화합의 산물, 연기의 산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불교는 자아 실재론 내지 실체론을 부정한다. 개체적 본성(자연)으로서의 나는 없다.

불교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강제를 외적인 것에 앞서 내적인 것에서 발견하며, 그러한 내적 강제로부터의 벗어남을 강조한다. 내적 강제는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아 그 삶을 부자유하게 만들기에 ‘장애(障礙)’라고 부르고, 그 장애가 인간을 미혹하고 어리석게 하므로 ‘혹(惑)’이라고도 하며, 그것이 인간의 정신과 삶을 힘들고 괴롭게 만들기에 ‘번뇌(煩惱)’라고도 부른다.

탐욕으로 인한 소유욕이나 과시욕이나 도벽, 의심으로 인한 불안과 초조, 분노 조절 장애로 인한 화,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들끓어 나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나는 내 안의 충동과 강박, 탐욕과 분노, 번뇌의 끈에 의해 이끌리는 꼭두각시이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틀에 얽매인 사유와 행동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또한 나의 자유를 가로막는 내적 강제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이러한 내적 장애인 일체 번뇌로부터 풀려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외적 강제로부터의 자유만을 강조하고 내적 욕망에 따른 행위를 자유로운 행위라고 보는 자유주의 내지 개인주의의 입장과는 상반된다. 그렇다면 불교는 개인의 실체성을 부정하고 개인적 욕망을 장애로 간주하면서, 외적 사회적 관계 내지 공동체적 덕목을 인간의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공동체주의에 근접해 있는가?

불교는 일체 존재의 상호 의존성과 인연 화합의 연기를 논한다는 점에서 개인보다 공동체의 우선성을 논하는 공동체주의의 통찰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불교는 두 가지 관점에서 공동체주의와 구분된다. 첫째, 불교는 인간을 공동체적 질서나 관계에 따라 각자의 정체성, 삶의 위치나 역할이 규정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불교는 일체 존재가 상(相)의 차이를 따라 드러나는 ‘분별적 현상의 차원’과 일체 존재가 현상적 분별을 떠난 공(空)으로, 상 너머 성(性)으로 드러나는 ‘무분별적 심층의 차원’을 구분한다. 공동체주의가 인간을 공동체의 상호 관계성에 따라 규정되는 표층적 현상 차원의 존재로 이해하는 데 반해, 불교는 인간을 표층의 현상적 차이 너머 심층의 공과 일자성(一者性)의 존재로 이해한다. 이처럼 표층 너머의 심층, 현상 너머의 공과 일자를 논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공동체주의와 구분된다. 둘째, 불교는 그러한 상 너머의 성, 공성과 일자성을 추상적 우주 원리나 이치 또는 인간 너머의 외재적 신(神)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든 인간 내면의 심층 마음,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의 보편적 마음으로 논한다. 이처럼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보편적 마음, 우주적 마음, ‘일즉다다즉일’의 마음, ‘절대 평등’의 마음, 일심(一心)을 모든 인간 내면의 심층 마음으로 논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개체를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규정되는 전체의 일부분으로만 간주하는 공동체주의와 구분된다.

인간은 누구나 표층의 차이를 넘어 심층 마음에 있어서는 절대 평등의 존재이다. 불교에서 자유와 평등은 현상 너머 심층에서 성립하는 자유와 평등이다. 이와 같이 공동체의 규정성 너머 인간의 절대 평등의 자유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불교는 공동체주의와 구분된다.

표층의 자아가 무아임을 깨달아야 심층의 일심을 자각할 수 있다. 꿈속의 나가 내가 아님을 알아야, 꿈속의 나가 실재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다. 내가 없게 되는 순간, 무아가 되는 순간이 곧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순간이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곧 인생의 긴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즉 무명(無明)을 벗는 것이다.

꿈을 말하고 꿈에서 깨어남을 말하는 것은 곧 꿈을 벗어난 경지, 일체 상을 여읜 경지, 열반의 경지, 무애의 경지, 자유의 경지가 있음을 의미한다. 꿈에서 깨어나 마음 본래 자리에 들어서는 것, 심층 마음, 일심의 본각을 확인하는 것,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 일체 중생이 모두 그 마음 본래 자리에서 서로 다르지 않은 하나임을 확인하는 것, 그래서 대자대비의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가 지향하는 것이다.

불교가 논하는 심층 마음의 초연의 자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개인은 자유주의가 말하듯이 자타 분별의 개인, 각각으로 흩어져서 서로 경쟁하고 투쟁하는 욕망의 개인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가 하나인 절대 평등의 개인이다. 초연의 자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들 간의 상호 관계도 내가 그 관계망 중의 어느 한 항에 고정되어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인간의 상호 관계 전체가 실은 내 안에서 함께 작동하고 있는 관계인 것이다. 나는 전체 허공이지 허공 중의 한 점이 아니고, 전체 광야이지 광야를 달리는 한 마리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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