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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서평] 바흐찐 수용, 무엇이 문제인가
[테마서평] 바흐찐 수용, 무엇이 문제인가
  •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 승인 2001.07.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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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해야할 탈정치적 수용 풍토

이득재 / 대구가톨릭대·노문학

얼마 전 춘천의 한림대에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주최로 ‘한국문학과 바흐찐’이란 주제의 학술대회가 열렸다. 필자가 알기로, 1990년 9월 서강대에서 서강대대학원 주최로 ‘바흐찐과 한국문화의 수용가능성’이란 제목으로 심포지엄이 열린지 11년 만의 일이다. 필자는 80년대 말 바흐찐의 저서가 독일어로 편역된 ‘말의 미학’(1979) 중에서 다시 바흐찐의 글들을 골라 ‘바흐찐의 소설미학’(열린책들 刊)이란 제목의 책으로 번역서를 낸 적이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 ‘문예학의 형식적 방법’(문예출판사 刊)에서도 오역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누구한테 바흐찐 전문가라는 이야기를 하질 못한다. 지식을 독점하고 지식을 독백화하는 것이 ‘反바흐찐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바흐찐을 처음 소개하면서 가지게 된 원죄 탓이 클 것이다. 그렇게 원죄의식에 사로잡혔을 필자가 90년대에도, 한림대에서도 바흐찐에 관한 얘기를 하니 바흐찐과 무슨 악연인지 모르겠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한 '라블레론'

한림대 학술대회가 있기 얼마 전 바흐찐의 1940년대 주저 중의 하나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시대의 민중문화’(이하 ‘라블레’)가 번역돼나왔다. 번역자들이 러시아어 전공자인만큼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90년대 서강대 심포지엄에서 우리의 탈춤과 비교되기도 했고, 루나차르스끼나 이글턴, 앨런 화이트 등 사이에서 ‘안전판’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토피아/디스토피아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바흐찐의 저서가 당시 러시아에 나왔을 때 평자들이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한 것같은 사건이라고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도 논쟁적인 저서가 ‘라블레’다. 하지만 바스티유감옥 운운하듯이 反스탈린적이라기보다는 ‘라블레’에 나오는 ‘집단적인 육체’개념 때문에 러시아의 고고찌시빌리나 독일의 보리스 그로이스로부터 친스탈린적이라는 혐의 또한 받고 있는 저서이기도 하다.

우리의 번역사가 그렇듯이 늘 우리는 한 사상가를 탈정치화하는데 익숙해 있는 듯하다. 번역의 정치학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푸코를 인식론 차원에서만 받아들이듯 바흐찐의 카니발론도 상대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국한시킨다. 학자와 지식인의 구별이 완고한 우리사회에서는 ‘어디 교수가…’하는 한 마디로 현실과의 접촉이 급속하게 차단된다. 하지만 바흐찐이 자신의 초기저작인 ‘행동철학’에서 강조한 것은 ‘참여적인 사유’다.

그가 말하는 크로노토프(chronotoph)란 그저 막연한 시·공이 아니라 죽어있는 현실이 생동하고 생성하는 현실로 발전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이라는 크로노토프는 현실과 역사를 ‘구체적으로’ 지각하게 만드는 범주라는 말이다. 라블레에 대한 책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라블레에 대한 바흐찐의 저서는 세상을 뒤집어 읽고 세상을 까발리는 책이다. 역자들이 ‘famil’iarnaia rech’를 ‘거리낌없는 언어’라고 번역했듯이 바흐찐과 라블레는 각자가 처한 시간과 공간의 당대현실에 대해 거리낌없이 직격탄을 날렸다. 그런데 정작 번역자들이 이것을 두고 부정 속의 긍정이니 부정과 긍정의 공존이니 하는 것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비크로노토프적인 판단이다.

바흐찐에게 있어서 부정과 긍정, 삶과 죽음, 시와 소설, 대화와 독백, 나와 타자, 웃음과 공포는 그저 공존하는 게 아니라 서로 越境하고 충돌하면서 현실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바흐찐의 차이가 거기에 있거니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지 않는 웃음은 홍소(laughter)가 아니라 그 강도가 현저하게 축소된 미소(smile)일 뿐이다. 물론 바흐찐은 ‘라블레’에서 예찬과 욕설, 하강과 상승 등의 ‘양가성’을 언급한다. 하지만 바흐찐이 카니발론에서 말한 바를 이런 식으로만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은 바흐찐이 염두에 두었던 웃음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바흐찐의 책, 광장의 언어를 읽고 나면 속이 후련하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바흐찐의 저서를 읽는 사람이 잘못되었거나, 바흐찐의 이야기가 모호한 것이거나 바흐찐을 오독하는 것일 게다. 이것은 번역이 자구의 번역을 넘어 우리 현실을 해석하는데 기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저서가 번역되었어도 그들의 논의를 끌어들여 우리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까발리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바흐찐도 마찬가지다. 바흐찐이 ‘라블레’에서 라블레의 작품을 거론한 이유는 라블레가 근대문학의 창설자들 중에서 가장 민주적인 작가이기 때문이다. 바흐찐의 ‘라블레’가 이미 번역되긴 했지만 이 책의 번역이 우리 현실에 필요한 이유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반성해야할 탈정치적 수용 풍토

우리에게는 아직 제도권 대학에 변변한 번역과 하나 없다. 일본이 근대화를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은 번역이 아니었을까. 중국에서도 지식인들은 1970년대에 중국이 서구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끔찍할 정도로 뒤져 있다고 판단했고 그리하여 1980년대에 번역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우리는 어떤가. 지식이 철저하게 독점돼 있다. 문화횡단작업인 번역을 통해 지식의 횡단이 허용될 리 없는 것이다. 분과학문의 해체가 학부제의 주요사안으로 상정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분과학문의 해체가 ‘학과’의 해체로 誤導되고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오도에 막판 굳히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번역을 통한 근대의 완성은커녕 번역자 선정의 비공개성에서부터 시작하여 번역 안팎에서 전근대적인 일들이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다. 번역을 통한 두터운 지식인층의 형성은커녕 번역자는 무슨 ‘실업자’ 쯤으로 인식되거나 심할 때에는 인생을 망친 인간 쯤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 지난 1980년대는 일종의 사회과학 번역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1990년대는 인문학, 뜻있는 필자들이 우리 현실을 까발리는 저서들을 창조해 낸 시대였다. 그 일은 지금도 현재진행이지만 드러커 류의 ‘지식생산’이 실제로는 인문학적인 지식의 창조를 불구로 만들려고 작정하고 있고 기존의 학술운동은 제도화되거나 지식공장이어야 할 대학은 신자유주의의 첨병기지, 이질성이 허용되는 라블레적인 광장이 아니라 밀실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라블레론 번역의 현실적 함의

바흐찐의 저서 ‘라블레’는 민주주의와 공공성에 대한 논의에 대단히 중요한 저서로 보인다. 칼 폴라니의 시장사회에 대한 비판처럼 이 책 또한 비자본주의적인 삶의 가능성을 타진하게 만든다. 바흐찐이 근대성의 부정적인 배치형태로 보았던 독백주의, 밀실주의가 번역(계)의 광장을 지배하는 시대에 ‘라블레’의 번역은 지극히 크로노토프적이다. 제 때에 나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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