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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은 유연하게, 태도는 실용적으로
사상은 유연하게, 태도는 실용적으로
  • 서영식
  • 승인 2022.06.16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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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사로 본 21세기 공공리더십 ⑮_서영식 충남대 교수·리더십철학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에 위치한 유허비(왼쪽), 신채호 선생 동상(오른쪽). 사진=서영식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에 위치한 유허비(왼쪽), 신채호 선생 동상(오른쪽). 사진=서영식

근현대 미국의 대표적인 실용주의 사상가들은 이념이나 사상의 독자적 가치를 주장하는 전통적 사고를 거부하고, 사상의 도구적 성격을 강조한 바 있다. 듀이(J. Dewey)는 “사상은 식탁 위의 포크”라고 표현한 바 있고, 제임스(W. James) 역시 진리는 “현금가치(cash-value)”라고 말함으로써 특정 이론이나 사상은 그것이 구체적인 결과를 생산할 경우에만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이념과 사상의 도구적 성격을 간파하고 실천한 인물을 꼽으라면, 20세기 ‘지식인 리더십’의 표상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 선생을 단연 떠올리게 된다.

충청도 출신(大田)인 단재의 성격을 묘사할 때는 흔히 특유의 완고함과 고집이 거론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고집이란 상대방이 나보다 더 나은 입장을 제시하더라도 그것을 근거 없이 혐오하고 질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단재는 한번 세운 전략(What to do)은 절대로 바꾸지 않았으나,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전술(How/when to do)은 유연하게 변화시켰다. 즉 단재는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이론은 탁상공론에 불과함을 명확히 인식하였고, 이에 조국의 독립과 정신의 자유라는 전략적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 부단히 사상적 변신을 시도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단재는 이른바 경술국치 직전부터 시작된 망명생활의 극한상황 속에서도 당시 동아시아에 소개된 서구 근대학문의 내용과 방법론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응용하는 방식으로 자주적이면서도 웅혼한 민족주의 역사학을 완성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단재는 당대의 식자층이나 사회 주류세력과 상당히 차별화된 행보를 펼쳤다. 예컨대 단재는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사실상 탁상공론으로 전락한 전근대적 ‘시시비비론’(是是非非論)을 ‘이해’(利害) 중심의 현실주의 가치체계로 하루라도 빨리 전환시킬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약관의 청년 신채호는 성리학의 빈자리를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새롭고 유력한 사상으로 평가받던 ‘사회진화론’으로 대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외래사상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무비판적 수용이 아니라, 당시 쇠퇴해가던 조선의 국력을 일거에 신장시키고 오랜 세월 지속된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인해 망각과 소멸의 위기에 처한 민족정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는 도구이자 방편으로 활용된 것이다.

이후 단재는 평생의 과업이 된 민족주의 역사학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그 유명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테제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단재는 ‘아’를 어떤 불변하는 실체적인 존재로 간주하거나, 비아를 끝없이 대립하고 극복해야할 영원한 타자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는 비아와 조우하고 이어지는 갈등상황을 겪으면서 내면에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자연스럽게 형성하게 된다. 즉 아(비아)는 자신의 인식대상이며 타자인 비아(아)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행위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비아(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욕구하는 존재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물질과 정신의 영역에서 도래하는 모든 새로운 만남은 궁극적으로 자아 발전의 계기이자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실용적 가치관의 토대가 된다. 이처럼 단재가 청년시절 하나의 숭고한 목표(민족자강과 국권회복)를 세운 이후 뤼순감옥에서 순국하기 전까지 지속된 새로운 사상의 수용(사회진화론, 민족주의, 아나키즘 등) 그리고 이와 연결된 수차례의 사유의 변화는, 현실적 안목에서 철저히 실용적 애국주의 노선을 견지한 결과였다.

백여 년 전 만주와 연해주 등지를 누비며 보여준 단재의 사상적 유연성과 실용주의적 태도는 이제 21세기 한복판에 서 있는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새롭게 음미하고 계승해야 할 정신적 유산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서영식 충남대 교수·리더십철학

스위스 루체른대에서 서양고전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충남대 리더스피릿연구소장과 출판문화원장을 맡고 있다. 한국동서철학회 편집위원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저서로 『공공성과 리더스피릿』(공저, 2022), 『고전의 창으로 본 리더스피릿』(공저, 2021), 『플라톤철학의 실천이성담론』(2017), 『청춘의 철학』(201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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