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0:55 (금)
고통과 더불어 살다…박완서 작가가 깨달은 것
고통과 더불어 살다…박완서 작가가 깨달은 것
  • 유무수
  • 승인 2022.06.17 09: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깊이읽기_『호미』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64쪽

한국전쟁·남편과 자식의 죽음 딛고 작가로 성장
왜곡된 현실 비판…생명·인격 존중하는 휴머니즘

박완서 작가는 왜 쓰는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4 후퇴 때 ‘나’의 가족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적이 끊긴 서울에 남아 고초를 겪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소름이 확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 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이 세상 사람들과 얽혀 있는데 홀로 독특하게 본 그 무엇이라면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사실 글 쓰는데 굉장히 오래 걸려요. 글을 쓰고 독자의 입장에서 그걸 읽고 또 읽습니다. 이런 건 여기서 걸러줘야 하는구나, 하고 다시 읽고 다시 읽고 그럽니다. 읽기는 쉬워도 뜻은 깊게 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의 산문집이며 2007년 초판의 개정판이다. 이 책 1부는 구리시의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호미로 정원을 가꾸는 일상생활을 담았다. 정원의 맨땅에는 아무리 김을 매줘도 잡풀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흙을 만지는 일은 몸을 고단하게 했지만 마음에는 휴식이 되었다. 잡풀 외에 쑥, 씀바귀, 돌나물, 부추도 자란다. 그런 것들을 소쿠리에 담을 때 작가는 흐뭇했고, 이슬에 젖은 흙을 주무르고 있으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과 평화를 맛보게 된다고 했다. 온갖 꽃들이 한꺼번에 피었을 때는 황홀감을 느꼈다. 

작가는 음악회에서 20세 전후의 젊은 음악가의 뛰어난 연주에 갈채를 보냈다. “겨우 스무 살에 천재성이 저렇게 아름답게 꽃필 수도 있구나” 하는 감동을 느끼면서 동시에 고통까지 함께 느꼈다. 자신의 과거 체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가의 스무 살은 개인의 삶이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의해 온통 굴절되고 말았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신입생 생활은 전쟁으로 갑자기 중단됐으며, 고인이 된 아버지 대신 가장 역할을 했던 오빠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사망했기에 참담한 시절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때 겪은 고통의 기억과 감정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꼬투리를 접하면 되살아났던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장녀인 호원숙은 『박완서 문학앨범』(웅진출판)에서 서울대 병원 인턴이었던 남동생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접한 순간을 이렇게 썼다. “그냥 명랑하게 전화를 받던 남편은 갑자기 얼굴이 흐려지더니 전화기 줄을 붙들고 우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엉엉’ 소리까지 내면서 말이다… 원태의 죽음, 이럴 수는 없었다. 나는 원태도 원태지만 어머니가 걱정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엄마, 엄마.’하고 울부짖으며 기둥을 붙잡았다.” 그해(1988년) 5월 11일은 작가의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날이었고, 약 3개월 후인 8월 31일에 작가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작가는 하나님에 대한 부정과 저주, 맥주와 소주, 불면증과 소화불량, 발작적인 설움, 문득 스치는 자살성 사고, ‘육신이 죽은 후 영혼은 남아 있는가’하는 질문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어갔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면서 시작된 작가의 생활은 중단될 것만 같았다. 1989년 새해가 시작되었을 때 “어머니는, 원태가 살아 있을 때 사 놓고는 어머니한테 사용하시기를 권했던 워드프로세서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기계에 대한 무섬증을 이겨 내고 새로운 글쓰기에 들어갔다. 「미망」도 다시 연재를 시작했다.”   

 

박완서 작가(1931∼2011)는 서울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한국전쟁과 남편, 자식의 사망 등을 겪으며 현실의 고통을 글로 승화했다. 사진=위키백과

작가가 네팔의 고지마을을 여행할 때였다. 새벽녘에 그 고지 마을에서 학교 가는 여학생을 보았다. “남존여비가 더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저개발국가에서 아들도 아닌 딸을 저 정도로 가꾸어 학교에 보내려면 본인의 각오도 비상해야겠지만 그 어머니의 노고는 도대체 얼마만 한 것일까. 그건 엄마들이 딸에게도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생생한 증거였다.” 마을에서 학교 가는 여학생의 광경만을 보고 어떻게 그런 내면을 세밀하게 상상하고 “가슴이 울렁대는 감동”까지 느낄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작가 자신의 체험이었다. 이 책 4부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의 교육열을 증언한다. 개성 박적골 종갓집 며느리였던 작가의 어머니는 자녀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하는 독단적이고 혁명적인 결정을 했다. 순전히 자녀에게 현대식 교육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사대문 밖 빈촌의 셋방에 살았던 작가는 고지마을 여학생처럼 매일 산을 넘어서 사대문 안의 초등학교를 다녔다.  

박완서 작가는 손자손녀들에게 한글을 깨우치는 선생님이었다. 한 손녀는 다른 아이들에게 사용했던 교육이 효과가 없었다. ‘사슴’이라는 글자가 어떻게 사슴 그림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글자로만 이루어진 동화책을 직접 만들었다. “나는 대림 아파트에 삽니다. 우리 앞집에는 준이라는 사내아이가 삽니다. 나하고 동갑인데 나보다 키가 크고 힘도 세고 개구쟁이지만…” 이런 식의 동화책을 만들어 읽어줄 때 아이는 또 읽어달라고 했고 점차 한글의 구조에 대해 문리가 트였고, 동화책에 있는 글자의 뜻도 알게 되었다.

호원숙 수필가에 의하면 남동생은 어머니가 만든 만두를 즐겨 먹어서 만두박사였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음식 이야기를 하면서 비 오는 날의 메밀 칼싹두기, 생일날의 수수팥떡, 박적골의 참게장, 강된장과 호박잎쌈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모두 어렸을 적 평화로웠던 고향의 음식이다. 『나목』에서 언급했던 ‘개성 만두’는 다루지 않았다.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박완서 작가가 아들의 죽음을 겪는 극한상황에서 “통곡 대신 써놓았던 일기”를 가톨릭 잡지 『생활 성서』 지면에 「한 말씀만 하소서」로 연재(1990년 9월~1991년 9월) 한 후 했던 말이다. 

작가가 정갈하게 다듬은 글로 전하고자 했던 뜻은 무엇일까? 권영민 문학평론가는 『박완서 문학앨범』에서 “(박완서 문학은) 왜곡된 현실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인간 삶에 있어서 진정성의 의미를 확인하고자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 산문집을 통해 짐작한다면 ‘겸손하게 다가갈 때 기쁨을 주는 자연, 무례·폭력·전쟁을 부정하는 비판적 이성, 생명과 인격을 서로 따뜻하게 존중하는 휴머니즘’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