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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박·쥐는 갈릴레오를 몰랐는가"
"황·금·박·쥐는 갈릴레오를 몰랐는가"
  • 김용준 교수
  • 승인 2005.12.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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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론: 과학하는 자의 자세

청탁받은 글에 주어진 제목이 ‘과학하는 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왜? ‘과학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가 아니고 ‘과학자’ 대신에 ‘과학하는 자’라고 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찰스 다윈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위명을 떨쳤던 토마스 헉슬리(Thomas H. Huxley)가 만년에 어느 모임에 초청강사로 참석했을 때 사회자가 훌륭하신 ‘과학자’(Scientist)라고 소개했더니 헉슬리가 등단하여 단호하게 사회자의 말을 부인하면서 구태여 자기를 과학과 관련해서 소개하려면 ‘과학인’(a man of Science)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이 일화는 당시의 과학자들의 정서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토마스 헉슬리가 당시 영국사회에서 저명한 생물학자였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1841년 이전에는 ‘Scientist’라는 낱말이 영어로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활자화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Daily News’지는 ‘Scientist’라는 낱말은 미국 냄새가 나는 신조어라고 사용을 거부하였고 1946년에 서거한 영국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사상가이며 ‘세계문화사’(The Outline of History)의 저자로서도 유명한 허버트 웰스(Herbert G. Wells)는 죽는 날까지 ‘Scientist’라는 단어를 거부하고 ‘과학인’이라는 표현이 옳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과학자’라는 말은 지금부터 100년 전만 하더라도 매우 낯선 말이었으며 그때는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로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음악인을 ‘Musician’이라고 하는데 피아노 치는 사람을 ‘Pianist’라고 하고 의사(Physician)라는 말이 있는데 치과 의사는 ‘Dentist’라고 한다. 각각의 이들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전자는 사람을 지칭한다면 후자는 피아노를 치는, 또는 틀니를 만드는 기능에 주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A Man of Science’와 ‘Scientist’라는 두 단어를 음미해보면 어째서 헉슬리가 그리고 웰스가 그리고 그 당시의 과학하는 사람들이 ‘Scientist’라는 단어를 그토록 혐오했는지 이해가 간다.

“수공업의 도제 중 가톨릭은 수공업에 잔존하려는 경향이 컸으며 따라서 수공업의 장인이 될 가능성이 컸던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는 상대적으로 공장으로 흘러 들어가 그곳에서 숙련 노동자층과 경영관리의 상층부를 충원하는 경향이 짙었다”라고 갈파한 사회학의 거인 막스 베버(Max Weber)가 강조한 점은 근세의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종교의 직업윤리가 이룬 중요한 역할이었다. 유물사관의 팽배했던 그 시기에 이미 근대 시민사회의 발전을 경제적인 관점을 벗어나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에 근거를 둔 시대정신으로 설명하고 또 종교의 교리 속에서 시대를 지배할 경제윤리를 적확하게 읽어낸 베버의 한 세기 앞을 내다본 선견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황우석이라는 이름을 신문지상을 통하지 않고서 처음 화제에 올렸던 것은 약 2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정초에 지금 모 대학의 중견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옛 제자가 세배 차 내방했을 때 몹시 격한 어조로 황금박쥐를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이미 신문에 충분히 소개가 되어버린 명칭이니 새삼 여기서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황금박쥐의 회의에서 통과가 되지 않으면 모든 연구 프로젝트가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첫 번째의 ‘황’이 황우석 교수라는 것이다. 조금 의아하게 생각되었다. 그런 대로 나머지 세 사람은 현직 정부 내의 장차관급 요직에 앉아있는 분들이니 그리 나무랄 일도 아니라고 생각되기는 했다. 그런데 황우석 교수의 이름이 첫머리에 끼어있는 것은 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싸이언스’지 발표논문의 공저자로 황금박쥐의 세 번째인 박기영 대통령 과학기술 보좌관의 이름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서 나는 이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일이라고 나 나름대로 생각을 접었다고나 할까.

글쎄 황금박쥐의 세 사람이 어떻든 이공계 분들인데 그들이 코페르니쿠스를 모르고 갈릴레오를 그리고 베사리우스(Vesalius)를 모를 이는 없지 않겠느냐 싶었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이 어떻게 성사되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단 말인가라고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소위 말하는 근대 과학의 탄생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지를 그들이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라는 반문이 저절로 나온다는 말이다.

과학 아니 학문의 정직성, 성실성 그리고 존엄성에 대한 위경심이 이렇게 철저하게 차단되어있는 황금박쥐 네 분에게만 아니라 더 고위층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것이다.

모든 언론매체가 황우석 사건으로 도배를 하고 있는 작금이다. 어느 평론자의 말대로 ‘황우석은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제호가 가슴에 와 닿는다. 학문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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