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6:45 (금)
기고: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비판
기고: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비판
  • 김봉률 부산대
  • 승인 2005.12.2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담론비평: 영어권 쇼비니즘과 장르 정치학 2

▲베네딕트 앤더슨 ©

이안 와트가 18세기 중엽에 ‘소설 발생’을 강조하는 것은 18세기 중엽에 소설이 발생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1958년에 '소설의 발생'이 출간될 때 소설 발생이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차 대전 후 미국은 영국을 능가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종주국으로 짧은 역사와 전통의 부재라는 특유의 미국적 콤플렉스를 해소하고자 했는데 소설과 관련해서 이루어지는 장르정치학 역시 그 작업의 일환이다. 더 나아가 콤플렉스 해소에 멈추지 않고 근대 민족주의가 미국에서 기원했다는 주장과 함께 소설 역시 미국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근대성의 기원을 전유하려는 전도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이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와 낸시 암스트롱과 레오나드 텐넨하우스의 '상상의 청교도'(The Imaginary Puritan)에서의 민족주의와 소설의 미국적 전유에서 잘 나타난다.

  근대 영국 자본주의에서 소설이 발생했다는 와트의 명제가 일단 미국에서 제도화되면 두 가지 현상이 생긴다. 첫째는 소설 기원의 문제가 일반 소설의 기원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문과 서구 근대 소설의 기원이 과연 근대 영국에서 일어났는가 아닌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은폐, 배제되고 당연히 소설은 근대 영국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제된다. 둘째는 영국과 미국의 관계가 전도된다. 영국에서 기원이 되는 소설이 리얼리즘이고 미국에서 기원이 되는 소설이 로망스라는 전도된 관계는 언제든지 영국 기원설을 미국이 전유하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가 1992년 '상상의 청교도'에서 주장한 ‘소설의 미국 기원설’은 미국적 예외주의를 논리로 내세운다. 소설의 근대영국 기원설이 유럽문학의 전통에서 하나의 예외라는 영국적 예외주의에서 출발했다면 미국적 예외주의 역시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영국문화가 식민지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준 반면 식민지의 글쓰기가 대서양을 가로질러 영국으로 되흘러 갔을 때 일어났던 것을 탐색해보려고 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들이 보기에 “소설은 무엇보다 최초로 유럽적 장르가 아니고 오히려 식민지 경험을 동시에 기록하고 기록했던 장르”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식민지에서 영어(English) 정체성의 새로운 토대를 창조했던 인쇄문화라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런 주장이 있기 위해서 그 전사로서 있어야 되는 것이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이다. 앤더슨이 강조하는 것은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는 것보다 미국이 근대 민족주의가 최초로 기원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는 개정증보판 서문에서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주목받지 못한 것에 분개하면서 “현 세계의 모든 중요한 것은 유럽에서 기원하였다는 기만에 익숙한 유럽 학자들에” 반기를 들고 “민족주의가 신세계에서 발원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나의 원래 계획의 일부였다”(13-4)고 주장한다. 이처럼, 아메리카 대륙, 특히 미합중국에서 발원한 민족주의가 유럽으로 건너가 언어 민족주의를 유발시켰다는 것은 소설이 미합중국에서 발생해서, 기원의 소설로 주장되는 영국의 󰡔파멜라󰡕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과 같은 논리구조를 이루고 있다.

앤더슨의 쇼비니즘은 근대 서구소설의 기원과 관련해서 중요한 언문일치와 민족의 문제에 관한 고찰에서 잘 드러난다. 앤더슨에 의하면, 16세기에 서구사회에서 이윤을 위한 지방어 서적의 대량 출판은 다양한 방언들을 소수의 표준어로 활자화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일한 지방 활자어 서적을 읽는 독자들은 다른 지방 활자어를 읽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대를 상상하고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언문일치가 종교개혁, 자본주의, 절대주의 시대의 지방행정어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하더라도 수많은 방언들이 난립해 있었고 이를 차츰 해소하여 민족의 경계를 정할 정도의 독점적 언어의 지위를 차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활자어로 보고 있다. 이 활자어들은 신문과 소설을 통해 나타난다. 그는 “사회적 유기체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통해 달력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를 따라 앞으로(혹은 뒤로) 꾸준히 움직이는 견실한 공동체로 민족을 생각하는 것과 정확히 비유가 된다”고 하면서 민족의 기원과 소설의 기원을 동일시하고 있다. 앤더슨의 인쇄에 대한 강조는 민족과 소설을 함께 묶어 상상의 실재로 만드는데 있다.

그런데 그에게 상상의 공동체는 민족만이 아니다. 중세 제국도 종교적 “상상의 공동체”이고 세계사적 조건에서 자본가도 “본질적으로 상상의 기반 위에서 결속력을 성취한 최초의 계급”이다. 자본가 계급을 결속시키는 것 역시 앤더슨에게는 활자어로 소설과 신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논리대로라면 근대적인 것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상상의 산물이 된다. 그런데 그가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을 형성하는데 활자어로 된 소설과 신문의 역할을 중점적으로 놓은 것은 일종의 문화적 기술주의이다. 문화의 물질성을 밝힌다는 것이 문화가 물질성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전도된 분석방법을 쓰고 있다.

  앤더슨에 따르면, 초기 서적시장은 라틴어를 아는 소수 엘리트를 겨냥하였으나 인쇄술이 발달하여 16세기 초에 이미 ‘기계제 재생산’의 시대에 들어서서 인쇄자본가들은 대량출판에 눈을 돌렸다. 이미 16세기에 인쇄가 상상의 공동체를 매개할 수 있는 수준에 와 있는데 왜 하필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인쇄만이 최초로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케 하여 민족됨(nationness)을 먼저 자각하게 했을까? 앤더슨은 인쇄된 자국어물들은 단지 “절대주의 전제정”을 중앙화의 도구로 제공했을 뿐이고 어떤 “원형적 민족적 충동”도 없었으며 “백성들에게 언어를 체계적으로 부과한다는 생각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필자와의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지만, 무엇보다도 민족됨이 공화국의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한 예비과정이다.

  그는 언어와 종교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전쟁을 했던 크리올과 본토인의 차별의 문제로 전환한다. 앤더슨은 근대 민족국가의 구체적 형성이 결코 특정 활자어가 결정적으로 도래한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민족이나 공화국이라 정의한 1776년에서 1838년 사이에” 나타난 새로운 정치실체인 미국에서 최초의 민족됨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민족됨”의 주장은 민족과 국가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 nation을 혼용하여 반증 회피의 수단으로 삼는다. 사실상 이들이 자각한 것은 민족됨이 아니라 국가의 형성 필요성이었으며, 또한 북미 독립운동을 한 13개 식민주의의 많은 지도자들은 노예를 소유한 부자 농업가들로 사실상 인디언이나 흑인 노예 그리고 프랑스나 스페인계의 일반인들과는 다른, 거의 봉건시대 영주들과 비슷한 지위를 지닌 자들로 근대적 민족의 범주와는 다르다.

  그는 인도를 동인도회사령으로 삼은 것을 예로 들면서 17세기 이후의 해외영토 정복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이전 시대의 것”으로 정리한다. 그런데 해외 식민지 정복은 선박의 건조나 군대, 엄청난 경비 등으로 인해 국가적 지원체계가 꾸려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따라서 절대주의 체제나 그 이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민족주의의 시원을 식민지 본국으로부터 차별을 당하는 크리올의 반항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또한 그것을 모방하여 유럽이 민족주의체제로 나아갔다는 전제 아래 입헌군주제나 절대주의 체제에서의 민족국가의 문제를 배제하였다.

▲메리 롤란드슨 ©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가 제기하는 문제는 '파멜라' 이전에 글쓰기 능력만을 지닌 평범한 여성의 육체를 중요시하는 소설들이 영국 내에서 없다고 할 때 이런 󰡔파멜라󰡕의 전통은 어디서 왔는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귀족에 대한 담론과 보통 사람에 대한 담론이 소설에서 분기하는 지점은 영국적 미국인인 메리 롤란드슨(Mary Rowlandson)이 쓴 '되찾은 포로'(The Redeemed Captive)(영국판 1682)에 있다고 보고 영국 산문의 원천이 되는 것은 17세기 말과 18세기 동안 북 아메리카 식민지들에서 씌어진 포로 서사라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17세기 인디언 포로서사에서 장르가 증식되고 분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롤란드슨은 납치된 몸으로 신세계에서 영국을 대표한다. 그는 인디언 즉 비영국적 문화 가운데서 문자해독의 힘을 보여준 영국여성으로서 영국적 미국의 경험이 되는 원천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영국적인 것을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이들 포로서사가 독자들에게 영국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바꾸길 요구하는 데 그것은 문자해독능력 곧 영어를 읽고 쓰는 능력의 문제이다. 특히 프랑스 혁명기 동안 프랑스 인들은 영국인 등장인물에 위협이 되었지만 후기의 포로서사에서 영국인 개인을 유럽 태생의 남녀와 구별해주는 것은 영어에 대한 문자해독능력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어”는 영국적인 것의 핵심이 되고 식민지에서 근대 국가의 탄생 문제와 결합한다.

  식민지 모국인 영국에서 독립할 때 민족의 문제에서는 언어를 배제했지만 독립한 이후 민족의 문제에서는 영어 활자어가 상상의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앤더슨과, 인쇄된 영어로 씌어진 포로서사가 최초의 소설이라는 암스트롱과 텐넨하우스는 소설과 신문을 통해 인쇄된 영어를 내세움으로써 유럽대륙과 아시아를 배제하고 급기야 영국을 배제하고 자신들이 민족주의와 소설의 기원을 전유하는 장르정치학의 놀라운 귀결을 보여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