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6:25 (금)
단풍길 따라 어머니를 보내고 삶의 道를 오래 생각하다
단풍길 따라 어머니를 보내고 삶의 道를 오래 생각하다
  • 이광호 연세대
  • 승인 2005.12.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년에세이_한 해를 보내며

한라산 등정으로 시작돼 금강산과 백두산을 오르고 묘향산까지 다녀온 금년 한 해는 참으로 복이 많은 한 해였다.


봄부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가을날, 영원의 세계로 떠나시는 어머님을 단풍길 따라 보내면서도 슬픔보다는 고마운 느낌이 가슴에 가득하였다.


철학은 나의 운명인가. 아버지는 세상의 어려운 문제들을 근원에서부터 풀기 위해서는 철학을 해야 한다며 철없는 아들에게 철학과의 진학을 권유하고 설득하셨다. 철학이 무엇인지도 알기 전 데모와 농성 등 투쟁으로 대학생활을 거의 다 보낸 아들에게 동양철학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분이 어머니다. 내가 하숙을 칠테니 걱정말고 공부만 하라는 것이었다. 환갑 무렵부터 아들을 위해 여러 해 동안 힘든 일을 하셨지만, 젊은 아들 친구들에게 밥을 지어주시며 기쁘고 슬픈 인생의 온갖 얘기를 나눌 수 있던 그 시절을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로 항상 가슴에 기억하고 계셨다. 운명하신 뒤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기 위한 닫힌 공간에 30여 시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머무셨지만 많은 친지와 친구들이 찾아와 옛일을 떠올리며 위로와 덕담을 해주었다.


동양철학을 시작한 이래 동양의 철인들은 진리를 왜 道라고 불렀으며 도대체 도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난 적이 없다. “혼돈한 가운데 천지보다 먼저 있어…천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지만 그 이름을 알 수 없어 도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노자와 “아침에 도를 알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의 문제의식은 도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도는 넓고 넓으니 어디서부터 공부를 시작하며, 옛 철인들의 가르침은 천만가지가 되니 무엇부터 공부를 시작할 것인가”라며 ‘聖學十圖’를 지어 후학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길을 열어 보인 이퇴계, “학자란 도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라며 치열하게 천명에 따르는 삶의 길을 추구한 정다산, 그들의 문제의식의 정점은 도의 인식과 실천이었다.


동양의 철인들은 도를 하나의 둥근 원으로 형상화하기를 좋아했다. 모든 현상이 그곳에서 출발하는 존재의 근원이 되고, 모든 현상이 그곳으로 돌아가는 존재의 귀숙처가 되기도 하는 영원의 진리인 도가 과연 실재할까. 그 도는 인간의 인식의 지평에 떠오를 수 있을까.


도를 향한 나의 철학 여정도 어느 듯 30년이 됐다. 노자와 공자, 퇴계와 다산의 문제의식들이 어느 듯 나에게도 친숙해졌다.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구절들을 가끔 떠올려 강의 시간에 학생들에게 툭 던진다. “도는 모든 존재의 동심웜이 아닐까”, “도는 우주의 영원한 구심력이 아닐까”, “도는 참과 마땅함이 하나됨의 자리가 아닐까.” 이런 물음들로 학생들을 당혹케 하며 혼자 즐거워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 학생들도 싫어하진 않는다.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만 못하며 좋아하는 것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했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하고 즐기기부터 해도 되는 걸까. 즐거워 한 뒤에 아는 것도 앎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인가.


지난 4월 연변대에서 ‘한국철학의 최근 연구동향’올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한 뒤부터 한국철학의 정체성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자주 하게 됐다. 몇 달의 고민 끝에 “한국철학은 김치다”라는 탄성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김치는 발효식품의 대표이며 한국인들은 온갖 식품을 다 발효시켜 먹는다. 발효시키면 속에 있는 것이 우러난다. 한국철학의 정체성은 우러남의 철학이라는 생각이다. 불교를 발효시킨 원효의 一心사상, 유학을 발효시킨 퇴계의 敬사상은 외래사상인 불교와 유학을 발효시켜 진리의 참맛이 우러나도록 한 대표적인 한국철학이 아닐까.


도는 원이며 원은 하나의 울이다. 하늘은 우주의 한울이다. 한울과 하늘을 하나로 이해하고, 거기에 존경의 생각을 담아 한울님, 하늘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진리를 섬기며 살고, 개인적인 우러남의 세계인 신명을 통해 진리와 하나됨을 느끼고 사랑한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는 그 자체가 동양철학의 대표적 정신이 아닌가. 과학문명과 전쟁의 쓰라린 고통을 거쳐 지구세계는 피할 수 없는 한울의 운명공동체가 되었다. 지구가 한울의 운명공동체라는 철저한 반성이 없이는 인류에게 화평한 미래가 더 이상 보증되지 않는다.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전쟁과 살상의 아픔, 국내의 실망스런 정치행태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한울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며 파괴이다. 우리들에게 신명나는 일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연은 궁하고 어려운 가운데 새로운 길을 열어나간다. 우리는 남북이 한울임을 세계에 보여주며 인류가 한울의 고귀함을 깨닫는데 실천적 기여를 해야 한다, 한국철학의 키워드인 우러남으로 한울과 하나됨은 세계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키워드가 될 수도 있다는 소중한 느낌을 얻은 한 해이다.                          

이광호 / 연세대·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