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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9] 맥주집에서 구상된 『유일자와 그 소유』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9] 맥주집에서 구상된 『유일자와 그 소유』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5.0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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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
바그너
브루노 바우어
에드가 바우어
바그너는 슈티르너 보다 7년 늦은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바그너가 바이로이트를 찾은 것은 1872년이고 슈티르너는 1856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슈티르너의 삶은 그의 생각이 대담한 것과 달리 소심했다. 슈티르너는 1806년 독일 남동부의 바이로이트(Bayreuth)에서 태어났다. 바이로이트에서 매년 여름에 열리는 축제로 유명하다. 그 축제에서는 바그너의 오페라 10 작품만이 공연된다. 그러니 바그너 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그너는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으니 슈티르너보다 7년이 늦다. 바그너가 바이로이트를 찾은 것은 1872년이고 슈티르너는 1856년 베를린에서 죽었으니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슈티르너가 죽기 전에 바그너는 오페라 작곡가로 유명했으나, 슈티르너가 그것을 보았는지, 바그너에 대해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젊어서 바쿠닌과 친했던 바그너는 슈티르너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실제로 알았다고 볼만한 증거는 전혀 없다. 

독일은 여러 개의 소국으로 나누어졌다가 1871년에 통일되었으나, 다시 1949년에 동서로 분단되었다가 1990년에 다시 통일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서독을 주로 기억한다. 그러나 독일은 우리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지는 않았지만 남북의 차이도 크다. 바이로이트나 뮌헨이 속하는 바이에른주 등 독일 남부지방은 프랑스와 가깝고 오래전부터 라틴족과 피가 섞여서 명랑 쾌활한 성격과 자유주의적 기질을 보이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다.     

슈티르너가 태어난 1806년에 나폴레옹이 독일을 침공했다. 슈티르너는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죽어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간 독일 북부 시골에서 자라다가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빈회의가 열린 1818년에 다시 바이로이트로 돌아왔다. 당시 바이로이트를 포함한 독일 남부지방은 북부의 프로이센과 달리 자유주의 풍조가 강했다. 그 예로 바이로이트는 입헌군주제를 실시했다. 당시 독일은 여러 개의 소국으로 나누어져 각각 정치체제를 달리했다. 지금 한반도처럼 남북 분단이 아니라 약 300개의 다수 소국 분단이었다.

1900년 바이로이트를 그린 엽서. 사진=위키미디어

 

잦은 중퇴 아내의 죽음 그리고 『유일자와 그 소유』

슈티르너는 그런 자유주의 분위기 속에서 중고등학교(김나지움)를 다녔다. 그러나 그 학교의 교장은 당시 프로이센 사상계를 지배한 헤겔 추종자여서 슈티르너도 사춘기에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헤겔 철학의 중심이었던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해서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입학 후 2년 뒤 결핵에 걸려 대학을 중퇴하고 정신병 환자였던 어머니의 간호를 하면서 여러 대학을 다니다가 1832년 베를린대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다시 2년 뒤 중퇴를 하고 교원자격을 따기 위해 베를린왕립학술위원회에 수험용 논문인 「학칙에 대하여」(Ǖber Schulgesetz)를 냈다.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그가 쓴 최초의 글인 이 논문은 헤겔 사상의 영향 아래에 쓰였지만, 그 10년 뒤에 쓴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는 헤겔을 철저히 비판하게 된다. 

1835년 교원자격을 딴 슈티르너는 베를린 왕립실업학교의 견습 교사로 채용되어 라틴어를 가르친다. 그리고 2년 뒤 9년 연하의 사생아 출신인 여성과 결혼하지만 아내는 이듬해 죽는다. 그의 염세주의와 에고이즘을 외로운 어린 시절과 성공적이지 못한 경력과 불운 탓으로 보지 않기란 어렵다. 그러나 불운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작은 행운은 그에게도 있었다. 1839년 베를린에 있는 사립 여학교에 취직하여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유일자와 그 소유』를 쓰기 시작하고 자기 집 부근에 있는 맥주집에 모여 술을 마시며 토론하던 ‘헤겔 좌파’ 사람들과 어울렸다.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 에드가 바우어(Edgar Bauer) 형제는 그룹의 선두주자들이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가끔 참석했다. ‘자유인’은 독일의 위대한 형이상학자인 헤겔의 철학을 논의하기 위해 만나 그것에 반대했기 때문에 헤겔 좌파로 알려졌다. 

브루노 바우어. 사진=위키미디어

『유일자와 그 소유』를 출판하면서 슈티르너는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 관계자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슈티르너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독일어에서 ‘Stirne’는 이마를 뜻하는데, 이는 그의 이마가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고상하다는 의미도 지니므로 자기 이미지와 일치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택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해고되었고 그 뒤로는 생계를 위해 거친 일을 해야 했다. 낙농 계획이 실패한 후 그의 아내는 그가 매우 이기적이고 교활한 사람임을 알고 그를 떠났다. 그는 여생을 가난 속에서 보냈고, 두 번이나 빚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1856년에 자신의 쓸쓸한 종말처럼 따분하고 평범한 『반동의 역사』(1852)를 썼고, J. B. 세이와 아담 스미스의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1840년대 독일에서 발전한 종교에 대한 헤겔 좌파 비판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역사를 정신의 실현으로 본 헤겔의 철학적 관념론에 반대하면서, 헤겔 좌파는 종교가 자의 어떤 바람직한 자질을 초월적인 신에게 투영하는 소외의 한 형태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관념적 이미지 속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을 ‘다시 적정하게’ 하고, 신에게 귀속되는 관념적인 자질은, 현재 부분적으로 실현되지만, 전환된 사회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인간의 자질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급진적인 개혁 요구가 되었다.

 

인간의 본질은 ‘머릿속 수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슈티르너. 사진=위키미디어

슈티르너는 명제, 반명제, 통합이라는 변증법적 추구를 포함한 헤겔적 태도를 발전시켰고 소외와 화해라는 주제를 채택했다. 그는 자신의 에고이즘 철학을 세계사의 정점으로 보았다. 실제로 슈티르너는 헤겔파의 마지막이자 가장 논리적인 존재로 불렸다. 그는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을 ‘인간성’이나 ‘계급 없는 사회’와 같은 어떤 일반적 개념으로 대체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구체적인 개인의 실재만을 믿었다. 

그러나 슈티르너는 그의 비판에서 헤겔 좌파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 포이어바흐가 신을 숭배하는 대신에 우리는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 곳에서, 슈티르너는 이러한 종류의 휴머니즘은 변장한 종교, 즉 ‘다른 세계에 대한 기독교의 갈망과 추구’에 불과하다고 선언했다. 인간의 본질이라는 개념은 단지 추상적인 생각일 뿐이므로, 우리의 행동을 측정하는 독자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본 슈티르너에 의하면 그것은 마치 신, 국가, 정의라는 고정된 관념처럼, ‘유령’ 이상의 실재도 없는 ‘머릿속의 수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에고이스트 아나키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보여준 슈티르너는 국가, 사회, 인간성, 신과 같은 모든 추상적인 실체를 부정하면서 서양 철학의 모든 합리적 전통에 반기를 들고, 철학적 추상화 대신 개인적 경험을 중시한다. 그의 저술은 계몽주의의 기본 원칙인 이성, 진보, 질서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한없는 자신감을 정면으로 공격한다. 국가와 사회 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제시한 그는 그 대신 계약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 평화롭게 경쟁할 ‘에고이스트 연합’을 제안한다.

 철학의 역사에서 슈티르너의 위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지위만큼이나 논란이 많다. 그는 에고이스트의 ‘자기 향유와 자기 과시라는 목적’에서 순수하게 기능을 충족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명제를 파괴하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라기보다는 니힐리스트에 가깝다는 평가도 있다. 가령 알베르 카뮈는 신에 대한 슈티르너의 형이상학적 반란이 개인의 절대적 긍정과 ‘난국 속에서 웃는다’고 하는 일종의 니힐리즘으로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개인의 신학적 우선권에 대한 그의 관심을 강조하면서 실존적 전통에 슈티르너를 둔다. 가령 허버트 리드는 그를 ‘철학자 중 최대의 실존주의자’라고 불렀다. 

기존의 가치와 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그는 키에르케고르처럼 개인을 찬양하고 헤겔 형이상학의 거대한 구조에서 개인을 해방시키려 했다. 그는 기독교 도덕에 대한 공격과 개인의 찬양이라는 점에서 니체와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를 예상하게 했다. 그의 책에는 허무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인 요소들이 있지만, 그가 모든 도덕적, 사회적 가치를 파괴하지는 않기 때문에 단순한 허무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더 높거나 더 나은 개인을 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거부하기 때문에 원초적 실존주의자도 아니다. 

슈티르너는 키에르케고르처럼 개인을 찬양하고 헤겔 형이상학의 거대한 구조에서 개인을 해방시키려고 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슈티르너의 개인 자치에 대한 방어는 벤자민 터커를 비롯한 미국의 개인주의자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사회적 아나키스트인 엠마 골드먼과 허버트 리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크로포트킨은 슈티르너의 반사회적 추진력과 도덕에 대한 부정을 비판했지만, 사회주의 시절의 초기 무솔리니는 ‘개인의 본질적 힘’을 다시 유행시키기를 원했다. 이처럼 슈티르너는 계속해서 좌익과 우익의 아나키스트들을 고무시키고 격앙시켜 왔다. 

『머릿속의 수레바퀴』는 1994년 조엘 스프링(Joel Spring)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 책에서 스프링은 기존의 교육과 사회현상이 인간의 머릿속에 수레바퀴를 주입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기존 교육의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개인의 비판의식을 중시했다. 머릿속의 수레바퀴를 제거하는 것을 슈티르너는 ‘자아 소유’라고 했다. 그리고 슈티르너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 사상을 가지는 것에 대해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고, 사상의 상실을 나를 위한 상실, 즉 나의 상실로 여기면서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만 그 사상은 나의 것이 된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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