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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백제사를 복원하다...견휜이 아니라 ‘진훤’
후백제사를 복원하다...견휜이 아니라 ‘진훤’
  • 김재호
  • 승인 2022.05.0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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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후백제사 연구』 이도학 지음 | 학연문화사 | 541쪽

진훤은 인내심으로 평화적 왕조 교체를 추구
후백제는 가족 싸움 아니라 살신성인으로 망해

‘전백제’에 이은 25년에 이른 ‘후백제’ 연구 성과 또한 만만치 않다. 후백제사의 첫 단추인 건국자 이름 표기 ‘견훤’은, ‘진훤’을 잘못 읽고 있다는 사실을 숱한 근거를 제시해서 밝혔다. 저자 스스로도 고백하기를 자신도 몰랐다면 ‘견훤, 견훤’하고 다녔을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나 연구자들이 난폭한 인물로 설정한 진훤에 대한 재평가를 했다. 진훤은 폭력적인 궁예와는 달리, 인내심을 가지고 평화적인 왕조 교체인 수선(受禪) 즉 신라로부터 선양 받으려고 기획했다는 것이다. 927년 후백제군의 경주 급습도, 친고려 행태를 보인 경애왕이 왕건에게 선양하려는 기도를 차단하려는 데 있었음을 밝혔다. 그로부터 8년 후 신라 경순왕은 왕건에게 선양하고 말았다. 

본서는 조지 오웰의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명언처럼, 역사서에서 포토샵 처리된 잃어버린 후삼국 반쪽의 역사 후백제사를 복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역작으로 평가된다. 포토샵 처리된 후백제 역사 가운데, 후백제군이 고려 수도 개경을 포위한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왕건의 부하인 박수경의 공을 드러내는 구절에 적힌 ‘발성(勃城)’이 개경 왕성을 이루는 발어참성(勃禦槧城)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구명(究明)했다. 이때 왕건은 박수경의 분전으로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고려사』 세가(世家) 즉 연대기가 아닌 열전 박수경전에 적혀 있는 구절이었다. 감추었던 왕건의 치부(恥部)가 박수경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다.

 

후삼국시대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해야

저자는 후백제가 왕위계승 내분, 즉 가족 싸움으로 망했다는 희화적(戱畵的)인 종전의 해석에서 벗어나, 대통합을 위해 내린 거룩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용단임을 밝혔다. 그리고 후삼국시대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국의 춘추시대처럼 명목상의 주(周) 왕실이 존치했지만, 주나라의 존재감을 없앤 것처럼,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한 기간도 이와 동질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로를 ‘남인’, ‘북군’, ‘북왕’으로 일컬으면서 통합의 대상으로 간주했고, 실제 통합을 이루었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신라와 발해를 가리키는 ‘남북국시대’ 용어가 지닌 당위론적인 공허함과 대조되는, 현실에 부합한 시대구분이었다. 

‘전백제(前百濟)’와 ‘후백제(後百濟)’의 역사를 아울러, 최초로 명실상부한 ‘전백제(全百濟)’의 역사를 출간한 저자의 노고는 의미가 깊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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