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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별종 ‘백제’…백제 시조는 온조가 아니라 ‘비류왕’
부여의 별종 ‘백제’…백제 시조는 온조가 아니라 ‘비류왕’
  • 이도학
  • 승인 2022.05.03 10: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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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백제사 신연구』 이도학 지음 | 학연문화사 | 572쪽

삼국사기가 밝히는 백제 왕실 부여씨의 내력
잘못된 백제사 연구를 바로잡는 40년 연구 결실

『삼국유사』에서는 백제사를 ‘전백제’와 ‘후백제’로 분류했다. 연구자 가운데 ‘전백제’와 ‘후백제’ 역사를 저서로 함께 간행한 이는 없었다. ‘전백제’와 ‘후백제’ 역사를 전공한 저자가 학계 최초로 ‘전후(前後) 백제사’를 동시에 출간했다.

 

이 중 ‘전백제사’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로서 『백제사 신연구』가 있다. ‘신연구’에는 기존 통념을 부순 놀랄만한 연구 성과가 즐비하다. 대표적인 사례로서 백제 건국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본서에서는 백제 시조로 널리 알려진 온조는 고려 때 정치적 대통합을 위해 ‘만들어진 역사’임을 밝혔다. 백제 시조는 동일한 『삼국사기』에 온조와 함께 적혀 있는 북부여 해부루왕의 후손인 ‘백제 시조 비류왕’이었다. 이러한 분석과 결론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이성과 상식의 선에서 접근했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백제 시조는 고구려계 온조로 알려졌지만, 이는 당대 백제인들의 인식과는 배치된다. 우선 『삼국사기』는 백제 왕실 부여씨의 내력을 부여에서 찾았다. 백제 왕실이 고씨가 아니라 부여씨를 칭한 까닭이었다. 의자왕의 풀네임 ‘부여 의자’의 연유였다. 백제 왕실은 해씨에서 부여씨로 교체되었지만 고씨는 없었다. 백제 제21대 개로왕은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저희는 근원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습니다”라고 밝혔다. 일국의 국왕이, 그것도 외교 문서에서 자국의 정체성을 부여에서 찾았다. 

제26대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개호(改號)를 통해 백제 왕실은 부여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적 법통 계승을 선언한 것이다. 백제인들은 자신들을 부여의 별종(別種) 즉 갈래라고 했다. 이렇듯 백제인들은 왕실의 성씨는 물론이고 국호까지 부여에서 찾았다. 이러한 백제인들의 부여 적통(嫡統) 의식은 결단코 헛되지 않았다. 백제 멸망 이래 현재까지 무려 1천400여년이나 마지막 수도는, ‘부여’라는 국가 이름으로 전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백제 역사의 정체성을 고구려에서 찾는 것은 근거 없는 믿음인 미신에 불과하다. 

 

미주홀 인천이 백제의 첫 건국지

백제의 첫 건국지도 비류왕의 도읍지인 미추홀 인천이었다. 이들이 지금의 서울인 위례성(한성)으로 옮긴 사실도 『삼국사기』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밝혔다. 그 결과 『삼국사기』 온조왕본기는, 기실 또 한 명의 시조로 『삼국사기』에 적힌 비류왕의 본기였던 것이다. 무려 8가지가 넘는 근거를 제시하여 구명했다. 백제사 연구에서 언필칭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만한 성과였다. 

 

백제의 총 지배권역. 이미지=위키백과

이렇듯 본서에서는 백제사의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져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고, 또 숱한 오류를 바로잡았다. 일례로 위덕왕은 출병으로 왜의 쇼토쿠 태자를 지원한 종교전쟁에 개입해 배불파(排佛派)를 제압하고 일본열도에 불교를 정착시켰음을 새롭게 밝혔다. 우리 사료 『단종실록』에서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린 이로 고구려 승려 담징을 말해왔지만, 일본의 고문헌 3건을 검토한 결과 백제계 도리 불사(止利佛師)임을 새롭게 찾았다. 그 밖에 ‘백제부흥운동’ 용어는 『일본서기』의 ‘임나부흥’에 뿌리를 둔 일제 황국사관에서 연유했으므로 부당함을 설파했다. 부여 은산별신제의 연원도 당초에는 역질을 막기 위한 겁주기용으로 중국의 유명 장수들을 내세웠다가, 해방 후에 별신제의 정체성을 재론하는 과정에서 복신장군 등의 위패가 모셔진 것이었다.   

본서 이름 그대로 ‘신연구’는, 저자의 40여 년 백제사 연구 진수(眞髓)가 응결된 것이다. 그랬기에 백제사 연구에 새빛을 보게 한 개안(開眼)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눈을 어지럽힌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학문 발전을 위해서는 이러한 진통과 혼란은 감내해야 하지 않을까?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융합고고학과 교수

한성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 위원장, 고조선단군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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