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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 : 80년만에 막스 베버의 새로운 전기 출간
해외동향 : 80년만에 막스 베버의 새로운 전기 출간
  • 정광진 독일통신원
  • 승인 2005.1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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肉體·질병과의 오랜 싸움 부각 … 지나친 도식화 아닐까

막스 베버(1864~1920)만큼 사회학, 정치학, 법학, 행정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여러 분야에 두루 영향을 미친 학자는 찾기 힘들다. 그는 ‘경계인’이었고 학문 경계 뛰어넘기가 주특기였다.

하지만 학문이 세분화되고 그 사이에 놓인 담이 견고해지면서 반쪽 혹은 사분의 일쪽이 된 베버만이 보일 뿐, 온전한 베버를 복원하는 일은 희망사항으로만 남아 있었다. 빌레펠트대 역사학부의 요아힘 라드카우 교수가 그 일을 떠맡아서 마리안느 베버의 베버전기 이후 무려 80년만에 새로운 자료를 반영한  ‘막스 베버: 사유의 열정’(Carl Hanser Verlag 刊)을  출간했다.

그는 후학들에게 영웅화된 베버는 “매력”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라면서 성인의 반열에 올라가 있는 베버를 끌어 내려서 그의 사상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했음을 밝힌다. 1천쪽이 넘는 지면엔 그의 가족사,  당대 지식인들 정치인들과의 교류, 저작들 뿐 아니라 그 시대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 그리고 죽음 이후 수용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베버에 대한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방대한 저작을 관통하는 ‘이념형’을 라드카우는 ‘Natur’(육체, 질병, 내면, 욕구)로 삼았다. 베버의 생애를  ‘Natur’와의 갈등, 싸움으로 본 것이다. 학문적 창조성이 강할수록 감성적 측면도 두드러지기 마련인데 “베버만큼 사유의 감정적 기반을 이를 악물고 부정하려고 했던 사람도” 없었다. 베버는 자신의 내적 자연을 억제하고, 자연은 그런 베버에게 보복한다. 그 이후 베버는 다시 자연과 화해하면서 구원을 경험한다. 이런 변증법적 구도가 이 책의 줄거리다.

베버는 이미 20대 후반에 학문적 명성을 얻었고 교수로 임용된다. 친척인 마리안느와 결혼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일중독’처럼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는데 이는 실상 만성우울증에서 도피하는 수단이었다.

베버는 1898년부터 신경쇠약이 심해져서 더 이상 집중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이 이른다. 라드카우는 이것을 과로나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의 죽음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당시 정치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생소한 경제학 교수로 임용돼 학문적 방향상실을 경험하는 등 예전처럼 일로 도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다다랐는데 그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임포텐츠 때문에 부부생활도 불완전한 상태였고, 마조키즘적 특성도 가지고 있었는데, 외적으로는 활달한 남성상을 지향하는 베버에겐 이것 역시 장벽이었다. 도피처 없음과 내면의 억제, 이것이 베버를 신경쇠약이라는 파국으로 몰고갔다는 것이다.

1898년에 강의·연구 불능 상태에 이른 베버는 대학 강의를 중단한다. 강단에는 20년이 지난 1918년이 되어서야 다시 서게 된다. 대학을 떠난 후 베버 부부는 이탈리아 등지에서 치료와 요양 생활을 했고, 이 시기의 베버는 직업, 결혼에서 실패자였고 확실한 거처도 없고 경제적으로 독립되지 않는 등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1902년부터 다시 학문적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마저 1909년까지는 병의 재발 때문에 수시로 중단되어야만 했다. 이런 한계상황에서 종교는 이후 그가 천착하게 되는 주요 주제가 된다.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가져다 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3년 로마에 머물면서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베버는 유명한 ‘근대자본주의 정신과 청교도적 금욕주의 사이의 선택적 친화성’ 테제를 제시한다. 베버가 ‘금욕주의’를 제시한 것을 일반적으로 버림받은 상태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삶의 방식을 찾으려고 고심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라드카우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면서 상황의 직접적인 반영이라기보다는 삶과 저작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로 해석한다.

 
1909년부터 그의 죽음까지는 ‘구원과 계시’의 시기이다. 비록 외도를 통해서였지만 베버의 ‘구원’은 성적인 옥죄임에서 놓여난 후 찾아왔다. 베버는 1909년 과거 자신의 제자였던 엘제 야페와 사랑에 빠지고, 또 1912년에는 피아니스트인 미나 토블러와도 연인의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베버는 평생 그를 괴롭히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생애 마지막 십년은 학문적 생산성이 가장 높은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종교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데, 종교의 의미를 ‘구원’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프로테스타티즘의 윤리’에서는 금욕을 정신의 원천으로 고양하였지만 이는 실상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라드카우는 베버가 ‘구원’을 화두로 삼은 것은 지옥 같은 상황에서 구원에 대한 무한한 욕구, 필요성을 느꼈던 탓으로 해석한다. 구원은 일련의 종교사회학 저작 뿐 아니라 이후 ‘경제와 사회’에서도 다루는 주제가 된다. 1920년 56세로 당시 유행하던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할 때 그의 침대 곁엔 마리안느와 연인 엘제가 함께 있었다. 베버의 구원은 정신, 금욕에서가 아니라 결국 사랑, 육체, 내적 자연과 화해함에서 찾아왔다.

역사학자다운 꼼꼼함과 치밀함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이 책은 베버 개인사 뿐 아니라 당대 독일 사회사를 이해하기 위한 교재로도 적합하다. 하지만 베버가의 사생활을 지나치리만큼 자세하게 드러내는 것이 과연 저자가 목적으로 삼았던 온전한 베버를 드러내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여지가 있다.

또한 ‘Natur’ 개념을 축으로 베버의 생애와 저작을 해석한 것은 하나의 해석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겠지만, ‘Natur’ 개념의 불명료성과 ‘Natur’와  생애, 저작 사이의 관계, 삶의 경험과 저작 사이의 인과관계가 긍정되기도 부정되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무리한 도식화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일부 베버 저작에 대한 해석에선 기존 베버 연구자들의 시각과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해서 이 책에 대한 베버 연구자들 사이에 논의가 뜨거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앞으로 베버 연구자라면 라드카우의 이 전기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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