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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이야기 재결합...인지생태로 주체성을 모색
그림과 이야기 재결합...인지생태로 주체성을 모색
  • 심광현
  • 승인 2022.05.06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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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그림의 새로운 시작』 심광현·유진화 지음 | 희망읽기 | 204쪽

오감을 시각화하는 역동적인 감성적 활력 찾기
현대미술의 권위에 맞선 비판적 지성과 이야기

필자는 최근 몇 년간 기후 위기-정치경제적 위기-인간생태학적 위기가 악순환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문명사적인 다중위기 상황을 분석하고 그 극복의 경로를 찾기 위해 <역사지리-인지생태학>이라는 독자적인 연구 프레임을 개척해 왔다. 다중위기의 원인과 해법은 분과학문의 협소한 틀을 벗어나 자연적-사회적 환경 변화와 인간 활동 변화의 상호작용 해명에 필요한 제반 지식들의‘통섭과 순환’이라는 과감한 실험을 필요로 한다. 특히 학문적 형식지와 일상적 암묵지 사이에 벌어진 거대한 간극을 좁히기 위해 전업주부이자 필자의 아내인 유진화와 공동저작의 형식을 택했는데, 『인간혁명에서 사회혁명까지 : 문명 전환을 위한 지식순환의 철학과 일상혁명 스토리텔링』(2020), 『대중의 철학이 된 영화』(2021)가 그 결실이다. 이번 신간 『그림의 새로운 시작: 문명 전환과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의 감각과 서사』(2022)도 이런 실험의 연장이다.

 

이번 책에서는 철학과 영화보다 더 오래된 매체인 그림을 구체적인 연구 대상이자 문명 전환의 한 방책으로 설정했다. 선사 시대 동굴 벽화에서부터 시작된 ‘그림’과‘이야기’를 저비용 고효율의 방식으로 재결합해 아래로부터 능동적 주체성을 활성화하자는 인지생태학적 전략이다. 모더니즘의 제도와 관행에 의해 분리되어 왔던 그림-이미지의 비언어적인 1차의식 회로와 이야기의 언어적 고차의식 회로를 최적화된 방식으로 재결합하자는 것이다. 이럴 경우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디지털-영상-인공지능-메타버스-NFT의 화려한 네트워크에 맞서 각자의 뇌에 잠재된 다중지능의 활성화에 기반한‘다중지능 네트워크의 네트워크’의 확산이 촉진될 수 있다. 오감으로 느낀 바를 손으로 시각화하는 행위에 내재한 역동적인 감성적 활력과 현대미술의 권위와 시대의 제반 모순에 맞서는 비판적 지성을 언어의 유희와 풍부한 이야기로 자유롭게 연결하는 다중지능 네트워크는 문명 전환을 주도해나갈 창조적인  주체양식의 필요조건이다.   

 

민중미술, 그림·이야기를 해학으로 결합

이 새로운 작업에 도움이 될 일련의 디딤돌을 과거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80년대 민중미술운동이 있다. 80년대 민중미술은 전시장 바깥의 가두시위나 민중적 삶의 현장과 결합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 제도가 강제로 분리시킨 그림과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 결합하기도 했다. 그동안 미술사 연구자들은 전자의 측면에만 주목했지만 오늘날 새롭게 되새겨야 할 지점은 두 가지 측면의 결합이다. 당시 양면을 탁월한 유머와 해학으로 결합한 작가들(주재환, 김정헌 등)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민중미술의 넓이와 깊이를 헤아리게 해주는 거름이 되었다. 또 화가 최진욱이 1990년 「그림의 시작」에서 제기한 ‘그림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같은 문제의식과 ‘감성적 리얼리즘’의 방법도 오늘날 생태기호학적으로 되살려야 할 중요한 자원이다. 

필자는 이번 책을 통해 그동안 많은 작가들이 암묵적으로 실천했지만 그 의미가 충분히 사회화되지 못했고 또 서로 어긋나 있었던 두 가지 궤적의 의미를 명시화하면서 새롭게 결합하려 했다.‘그림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시동을 걸었던 ‘감성적 리얼리즘’의 오토포이에시스-미메시스적인 의미와 ‘넓은 세상’의 이야기를 그린 ‘민중적 리얼리즘’의 어포던스-미메시스적인 의미가 그것이다. 이 양자의 새로운 결합을 생각하면서 책의 부제를 <문명 전환과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의 감각과 서사>로 잡았다.  

안정과 이행의 반복 속에서 요동쳐온 세계사로 시야를 넓히면 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을 풍요롭게 발전시킬 다양한 자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회 체계가 ‘안정된 시기’의 예술은, 지배적인 생산관계의 재생산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겪게 되는 다양한 갈등과 고통을 카타르시스로 순화함으로써 제도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창작의 내용과 표현은 원자화된 개인들의 단성적인 독백에 치중하게 된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혁명의 시대,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 68혁명의 시대와 같은‘이행기’가 도래할 때마다 시스템의 요동으로 발생하는 공백 속에서 자유로워진 개인들을 사회적 개인들로 연결하는 혁명적인 예술이 등장했다. 흩어진 개인들을 역동적인 링크로 연결해 거대한 혁명의 물결을 구성하는 척도 없는 네트워크의 형태 속에서 대화적-다성적-민중적 리얼리즘의 예술이 개화했던 것이다. 오래 전 동굴벽화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안정기와 이행기가 주기적으로 교대하는 과정에서 민중, 그림, 이야기, 세상은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했다. 이제 다시 거대한 문명 전환의 시기를 맞아 이 네 가지의 새로운 만남이 요구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80년대에 첫발을 내딛다가 그동안 소강상태에 머물렀던 서사-화, 그림-이야기, 이야기-그림, 세계-그림의 새로운 만남이 그것이다. 

책의 1부 1~3장에서는 이런 통섭적 만남이 오늘의 문명 전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빌렘 플루서의 기호이론과 퍼스의 기호학, 들뢰즈의 이미지론, 깁슨의 지각의 생태학, 필자의 인지생태학 등을 연결해 해명하고자 했다. 4~5장에서는 <안정기의 사유/예술>과 <이행기의 사유/예술>이라는 새로운 문제틀을 제시하고 후자의 관점에서 미하일 바흐친과 70~80년대 김윤수의 리얼리즘 미학과 민중미술운동의 현재적인 의의를 재조명했다. 이런 점에서 책의 1부는 미술이론 또는 미술철학에 해당한다. 반면 책의 2부는 이런 관점을 오늘의 시점에서 구현하고자 노력해온 작가들(26명)을 선정해 필자가 기획하고 개최한(2022년 3월 16~29일) 전시회 <그림의 새로운 시작>의 기획 경위와 출품작 46점에 대한 이야기꾼-작가 유진화의 해설 및 본 전시를 기획한 필자의 평론으로 구성했다. 

2부의 각 페이지마다 작품 이미지와 유진화의 작품 해설이 짝을 이루는 각각의 그림-이야기는 26개의 신(scene) 같은 역할을 한다. 반면 필자의 평론은 이를 11개 시퀀스(sequence), 3개 막(act)의 형식으로 연결한 하나의 <서사지도>라 할 수 있다. 3개의 막은 전시회의 3개 소주제에 해당한다: <자연생태계 위기의 감각과 교감>(최진욱, 김경주, 류연복, 이명복, 박진화, 이종구, 심광현). <인간생태계 위기 속 몸과 마음의 풍경>(박영균, 박은태, 이윤엽, 김태헌, 황세준, 김지원, 민정기, 이선일, 신학철, 정정엽), <사회생태계 위기의 역사지리적 풍경>(김영진, 주재환, 김천일, 김정헌, 이태호, 김재홍, 임옥상, 박흥순, 박불똥). 26명 출품 작가들의 ‘서사-화’, 이야기꾼-작가의 그림-이야기, 전시 기획자가 몽타주한 서사지도가 관객들에게 잠재된 다양한 역사지리-인지생태학적 경험을 일깨워 코로나19를 계기로 증폭된 세 가지 생태계의 위기 극복의 실마리를 찾는 데 기여하기를 의도한 기획이다.   

이런 복합적 취지 때문에 <문명론 + 인지생태학 + 미술이론 + 그림-이야기 + 전시평론>이 하나로 엮인 독특한 형태의 책이 만들어졌다. 안정기의 과잉결정이 해체되면서 수많은 틈새들이 열리는 이행기의 과소결정이 심화될수록 이렇게 실험적인 마주침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심광현 한예종 명예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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