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원장 김흥규 교수)이 지난 8일 고려대 개교 1백주년을 맞아 ‘한국학의 정체성 대토론회-민족학, 지역학 또는 해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김철 연세대 교수(국문학), 이효걸 안동대 교수(동양철학),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 최원식 인하대 교수(국문학) 등 4명이 발제자로 나선 이번 심포지엄은 한국학을 비판적, 해체적 시각에서 조명하는 느낌이 두드러진다. 국사학, 국문학 등이 주도해온 주류 한국학계에 대한 중층적 비판으로 기획됐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자기의 완성’이란 덕목 잃어버린 한국학
먼저 ‘개인의 완성과 한국학의 정체성’을 발표한 이효걸 교수에게 한국학은 自己와 성찰이 빈 ‘虛學‘이다.
이 교수는 “자기반성적 정신능력을 통해 지식을 자기로 회귀시키고 내재적 실천으로 개인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과거 유교나 불교에 비해 근대적 학문은 지식을 인간과 분리시켜 ‘개인의 완성’에 봉사토록 하는 전통 한국학의 핵심을 상실하게 만들었고 비판한다.
이것은 곧 민족이나 국가, 정치적인 실천을 강조해온 한국학이 ‘안쪽에서의 시선’을 잃었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이 교수는 구체적으로 어떤 학문이 이런 기계론적 패러다임에 서 있는지, 그렇다면 현대의 유교·불교 연구는 현대인의 자아완성을 위한 고민을 경주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
‘결여로서의 국(문)학’을 발표한 김철 교수에게 한국학은 ‘불립문자’다. 그는 국학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국학을 표방한다는 것은 환상을 좇는 일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김 교수는 노예가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자기기만적인 꿈이듯, 국학을 체계화하려는 학문적 시도 또한 그림자놀이라고 말한다.
다소 추상적인 논리의 연쇄를 선보인 끝에 김 교수는 “자신이 노예임을 깨닫는 순간 닥쳐오는 절망을 행동화하는 것”이 오늘날 학문하기에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민주체에서 벗어나 수많은 다양한 정체성들을 통해 개개의 주체성 추구가 이뤄지다보면 “사람이 많이 다닌 곳이 길이되듯” 어떤 學이 그려질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한국학의 존재원리를 부정해야 한국학이 가능해진다는 의견이다. 그러나 한국학이 “국민으로서의 주체성”을 강요한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과연 사실인가. 과연 한국학 연구자들이 국민적 주체성으로 학문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는 의문이다. 김 교수의 ‘결여이론’은 脫국학의 강한 몸짓에 비해 구체적인 대안이 없어 아쉽다.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발표한 최원식 교수한테 기존의 한국학은 일종의 ‘고립학’이다. 최 교수는 앞으로는 동아시아의 텍스트로서 한국현대문학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럴 때 문학은 “서구의 도착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동아시아형 자본주의(유교자본주의)와 동아시아형 사회주의(마오주의, 주체사상, 베트남형 사회주의), 모더니즘과 온갖 포스트주의가 부글대는 용광로”이다. 그 속에서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시현한 동아시아 현대문학을 자상하게 궁구할 때 한국현대문학연구의 새 길이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동아시아
한국 현대문학을 동아시아 텍스트로 본다는 게 가능할까. 그러려면 문학텍스트 자체가 역사적, 사회적 콘텍스트가 강해져야 하고, 다분히 텍스트주의와 현란한 이론 자율주의와 내면풍경 묘사에 가까운 현실의 문학연구가 완전히 탈바꿈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고려 없이 동아시아로 초대하는 것은 좀 무리라는 느낌도 준다.
그렇다면 ‘한국학의 특징과 한계, 발전을 위한 조건’을 발표한 최장집 교수에게 한국학은 무엇일까. 현실적인 한국정치문제, 사회문제에 대해서만 발언해온 최 교수이기에 ‘한국학’이라는 학문 내적인 문제에 대한 그의 의견은 새삼 궁금해진다. 결과는 약간의 놀라움. 최 교수는 한국학이 심각한 ‘발육부진상태’에 있다고 진단한다.
최 교수는 팔레, 커밍스, 에카르트, 핀치 등 대표적 외국 한국학자들을 거론하며 외국인에 의한 한국학들이 다뤄야 할 중요한 문제들을 제대로 다룬 데 비해, 한국인에 의한 한국학은 그런 연구가 드물다고 지적한다.
특히 그는 오늘날 “역사연구가 한국사회의 현재에 있어 ‘다른 수단의 정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동북공정 문제, 독도문제 등을 향한 격렬한 민족주의적 열정의 북새통 속에서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울 만큼, 현대사의 역사연구보다 고대사 연구에 더 큰 비중이 주어지게 되는 역설적 현상”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언론에 기대지 않는 학문 커뮤니티 시급
최 교수는 서구나 일본 등에 비해 학문을 늦게 시작한 한국에서 걸출한 성과들이 서구의 한국학에 비해 적다는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의 학문적 하부기반이 강해지고 지적 축적이 질적인 어떤 도약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기에는 오늘의 상황이 매우 척박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우려는 한국학의 세계화가 한국어로 된 연구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데 있다는 식으로 각종 행사가 이어지는 현상에서 비롯된다.
최 교수가 볼 때에는 한국학의 세계화는 한국에 대한 연구가 세계적 수준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정부의 정책, 연구비의 비약적 확대, 시장원리를 통해 경쟁력을 제공하려는 대학의 정책들에 의해 추동되고 있는 한국학의 세계화라는 추세는 “엄청난 양적 결과들을 만들어내나 문제성은 갖지 않는, 빠르고 편안한 확대재생산을 결과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학문의 영역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미디어를 통한 대중화, 정치권력과의 관계 등을 포괄해서 사회와 가까이 소통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역사와 사회를 현실적이고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부정적인 효과를 갖는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최 교수가 논문의 본문에서 세번이 넘게 강조한 돌파구는 우선 “학문을 평가하는 기준의 정립”이고, 그런 평가를 주도하는 “커뮤니티의 발생”이다.
한국학이 ‘虛學’이고 ‘불립문자’이며 ‘고립학’인데다가 ‘미숙아’라는 네 관점의 비판이 과연 현실적인 판단인지, 혹시 자학적이고 추상적인 판단은 아닌지, 혹시 최신의 성숙한 한국학 연구를 접하지 못한 탓은 아닐까. 최재석 前 고려대 교수가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을 써 스타덤에 오른 마르티나 도이힐러에게 "내 연구를 도용해갔다"라고 항의하는 사례에서 보듯 말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