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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한 주체의 정신분석을 넘어 새 인문학으로
불투명한 주체의 정신분석을 넘어 새 인문학으로
  • 신인섭
  • 승인 2022.04.29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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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프랑스철학과 정신분석』 신인섭 외 14인 지음 | 그린비 | 656쪽

정신분석에 빠져서도 독창성을 띠는 프랑스철학의 변모
실재론적 현상학과 실증적 정신과학으로 새 엄밀성 추구

지난 세기, 정신분석학과 프랑스철학은 한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다가 그 사랑이 한낱 오해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지면서 서서히 정리되었다. 그러나 이 불행한 스토리는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프랑스철학의 이념체계가 정신분석학의 거울에 비견되면서 오히려 전자의 독창성이 고양된 것이다. 기실 프랑스철학은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의 이름으로 프로이트로부터 등을 돌렸었다. 고전적 합리주의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변장을 강요받는 ‘성적(性的) 에너지’에 따른 정신현상이라는 괴팍한 개념에 찬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발성에 지배받는 ‘리비도 주체’의 충동적 논리가 문제였다.

 

그런데 신비하고 환상적인 이 주체는 19세기 “의심의 시대”와 잘 어울린 데다가 주체보다 구조를 우선시하는, 언어학적 기반의 구조주의로 더 공고해진다. 하지만 프로이트를 가장 환영한 것은 현상학이었다. 사르트르는 무의식을 거부했지만 결정론에 반대되는 실존적 의미를 거기에 부여하기 위해 정신분석의 외피를 사용했다. 메를로퐁티도 마찬가지였으나 감각성의 존재방식인 세계와의 지각적 관계로 모종의 ‘불투명성’을 재해석하려고 살(chair)로 변주된 정신분석을 계시하였다.

 

정신분석의 이론적 허세에 대한 비판

철학자들이 프로이트의 무작위 언술 치료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정신분석에서 ‘실존적 주관성’에 대한 어떤 합리적 보증을 기대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존재가 문제가 되는 ‘현존재’가 인간이념의 중심을 차지하는 동안 말디네가 단적으로 현상학적인 ‘본원적 정신분석’을 고안하면서 프랑스철학과 정신분석의 운명은 더욱 엮인다. 

동시에 정신분석은 라캉과 야콥슨을 통해 인문학 차원의 반(反) 실증주의적 보증을 애써 찾기도 했는데, 이처럼 부풀려진 정신분석의 이론적 허세에 비판이 부족했던 사실에 대해서는 분석철학과 포퍼의 인식론이 진작 의문을 제시했었다. 그랬건만 정신분석이 이론화되는 과정에서는 포퍼 식의 의문이 불가능했으며 고로 프로이트의 해석은 반박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검증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사실 그 자체가 모든 폭로의 위협에 저항하는 것처럼 위장된 프로세스의 효과들로 간주되기 때문이었다. 정신분석의 약점은, 그것이 불확실한 임상들의 기만주의로 가는 길을 열어버린 데다가 이 같은 협잡극의 관계적 효과가 그 해석적 기반이 의심되면서도 보존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황홀한 데이터들로부터 의식주관을 구분하는 것을 중단했던 현상학도 어느 시점부터는 경험에 대한 보다 실재론적인 접근으로 방향을 틀었다. 더욱이 뇌의 메커니즘을 밝힌 인지과학으로 더 이상 우리는 과학적인 객관성과 정신분석의 환원적 실증주의를 혼동하지 않게 되었다. 자연과학의 진보는, 몇몇 범주의 메타심리학적 정신현상과 또 자폐증의 맹아인 오이디푸스라는 허망한 스토리에 가공적으로 연결되던 질환들을 대신 해결해준 것이다. 

프랑스에서 간행된 『정신분석학 흑서』(Les Arènes, 2005)는 얼추 예상한 대로, 위선적인 의사들의 분노는 불러일으켰지만, 적어도 철학자들이 프로이트주의라는 ‘심리학 성서’의 심급들에 마냥 굴복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질적인 특수성 속의 주관성, 즉 ‘의미와 관계를 맺는’ 주체를 구축하는 것으로 여겨진 왜곡된 정신과학에서 벗어난 프랑스철학은 인문학과의 모호한 관계를 탈피하면서 새로운 엄밀성을 추구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철학 발전의 기폭제가 된 정신분석학과 동거하는 동안, 프랑스철학자들은 고유의 ‘사유 메스’로써 고전적 정신분석학의 틀을 깨고 인간과 사회 그리고 존재의 참모습을 이해시킬 새 패러다임들을 제시했다. 프로이트의 통찰을 창조적으로 성형한 프랑스철학자들의 드라마틱한 시도들이 이 땅의 연구자들을 통해 소개된 이번 신간은 프랑스철학의 고급 스펙트럼이 보관된 기념비적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신인섭 강남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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