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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삶
물질의 삶
  • 최승우
  • 승인 2022.04.20 1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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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복 외 11인 지음 | ITTA | 296쪽

인간 중심주의 너머 비인간 행위자들의 세계
살아 움직이는 물질의 행위성에 주목하다

시대와 분과를 가로지르며 최신 이론과 사상의 동향을 소개하는 서평 무크지 《교차》 2호 《물질의 삶》이 출간되었다. 2호는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비인간 사물의 행위성에 주목하며 현대 철학에 존재론적 전회를 불러온 신유물론을 축으로 삼아, 물질을 수동적이고 무력한 재료로 간주한 기존 인식론에 반대하여 물질이 지닌 적극적인 행위성과 생기, 활력에 주목한 여러 학문 분과의 논의를 짚어본다.

‘주제 서평’ 8편은 과학철학, 신유물론, 페미니즘 철학, 종교학, 현상학, 미디어학, 기술사, 정치경제학 분야의 주요한 책들이 생동하는 ‘물질의 삶’을 어떻게 탐구하는지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우선 자연의 물질을 규정하는 과학 지식 체계에서 시작해, 물질의 활력을 통해 인간 주체 중심의 철학적, 정치적 질서를 다시 배열하는 문제, 정신에 종속되어 있던 몸을 다시 사유하는 문제, 사상과 텍스트가 아닌 물질적 요소를 통해 종교 문화를 다시 읽어내는 문제로 이어지며, 현상학이 마주한 질료의 문제 또한 살펴보며 추상적, 철학적 차원을 논한다.

나아가 현대 정치 및 사회, 문화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매체와 기술의 발전,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석유와 정치 권력의 관계 등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차원까지 분석한다. 이어 ‘비주제 서평’ 3편은 성인지 의학 및 의료인류학, 종교인류학, 사회학 분야의 고전과 주목할 만한 연구를 되짚어 본다. ‘에세이’에서는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이론과 실천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돌아본다.

“물질의 행위성과 활력이라는 지적 도전”
추상적 질료에서 일상의 사물까지,
현대 이론의 최전선이 사유하는 인간 바깥의 삶

‘주제 서평’은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에서 학제적 담론으로 확장되면서 현대 이론의 최전선을 형성하는 ‘물질’ 연구를 다룬다. 물질은 추상적 질료이건 구체적 사물이건 누구에게나 “삶에 밀착된 사안이고 매혹과 두려움을 야기하는 뜨거운 관심사로, 그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우리 삶에 현전한다”.(안연희, 본문 중에서) ‘주제 서평’에 수록된 글 8편은 20세기 이후의 이론과 사상이 인간을 주체의 자리에, 물질을 객체의 자리에 고정해온 인간 중심주의의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것’의 바깥, 두렵고도 매혹적인 비인간 행위자들의 세계로 시야를 확장하게 된 경위를 다각도에서 조망한다.

먼저 신광복의 〈물질, 합의, 다원주의, 그리고 실재주의〉는 ‘과학자들은 물이 H2O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물음을 따라가며, 장하석의 《물은 H2O인가?》가 물질의 미시적 구조 연구를 통해 원자화학 연구사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발전적 연구 방향을 제시하고 있음을 상술한다.

이어지는 글 3편은 2000년대 인문학의 ‘물질적 전회’로 불리는 신유물론과의 연관 아래 진행된다. 문규민의 〈물질의 행위생태학: 물物의 약동〉은 오늘날 신유물론 철학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인 생기론적 유물론의 ‘원전’,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을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존재론(OOO),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머니즘 등 동시대의 철학적 맥락 속에서 비판적으로 독해한다.

김지은의 〈다시, 그러나 다른 ‘몸’을 상상하기〉는 엘리자베스 그로스의 《몸 페미니즘을 향해》를 중심으로, 현대 페미니즘 철학이 몸과 정신, 생물적 요소와 사회 구성적 요소, 섹스와 젠더의 이항 대립에서 빠져나와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의 몸에 주목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신유물론 페미니즘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안연희의 〈성물의 역설과 활력으로 쓴 물질의 종교사〉는 ‘살아있는 성스러운 물질’이 쇄도했던 중세 후기 종교 문화를 다룬 캐럴라인 바이넘의 《그리스도교의 물질성(Christian Materiality)》을 통해, 인간 중심의 근대적 관점이 확립되기 이전에 영적, 정신적 추구가 어떻게 성물과 같은 구체적 물질과 관계 맺었는지를 논하며 ‘물질 종교’ 연구의 흐름을 소개한다.

조태구의 〈질료 현상학: 현대 프랑스 현상학의 두 갈래 길〉은 논문 선집 《물질에 관한 현상학》을 살피며, 형상과 관계 맺기 이전의 순수한 질료를 파악하지 못한 후설 현상학의 한계를 현대 프랑스 현상학이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는지 개괄하면서 물질에 관한 추상적 차원의 논의를 마무리한다.

이후의 글 3편은 미디어학, 기술사, 정치경제학을 통해 구체적 사물이 어떻게 현대적 삶의 조건을 형성하고 또 변화시키는지를 논한다. 심효원의 〈20세기의 미디어 역사 / 21세기의 미디어학 역사〉는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는 문구로 널리 알려진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대표작 《축음기, 영화, 타자기》를 축으로, 미디어의 물질성을 다루는 메타 학문인 미디어학이 어떻게 인간을 영혼이 제거된 정보 시스템으로 파악하며 오늘날 문화 연구에 반향을 일으켰는지 상론한다.

유상운의 〈기술로 사회 다시 보기〉는 ‘기술의 사회사’를 개척한 루스 슈워츠 코완의 업적을 돌아보며, 거대 기술의 혁신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일상의 물건에 주목하여 이를 정치사, 사회사, 노동사, 문화사 등과 엮어낸 《미국 기술의 사회사》를 논평한다.

끝으로 전현우의 〈중동의, 그러나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석유라는 물질이 민주주의를 억압해 온 양상을 탐구하는 티머시 미첼의 《탄소 민주주의》를 계기로 경제 개발 방법과 성장의 한계, 정치적 기구에 관해 고찰하며, 에너지 활동의 변화 및 균형 잡힌 혼합 정체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새로운 책과 흘러간 책,
낯선 문제와 오래된 뿌리

‘비주제 서평’은 신간과 구간, 고전을 포괄하며 우리가 맞닥뜨린 현안을 해결할 단초를 제공하고, 한국 문화의 한 조각을 외부의 시선으로 관찰하며,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고전 번역의 문제를 돌아본다. 서보경의 〈페미니즘과 거대한 규모의 의학〉은 코로나19 백신 접종과 관련된 월경 이상 문제를 발단으로, 여성의 질병과 고통을 다룬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언다잉》, 《질병과 함께 춤을》을 함께 읽으며 지식 체계의 어긋난 틈이 낳은 의학의 구조적 무지에 대한 해결을 촉구한다.

권용란의 〈서양 인류학자의 시선으로 본 한국의 여성 의례〉는 1970년대 한국 여성의 삶과 무속을 다룬 로렐 켄달의 《무당, 여성, 신령들》을 통해 근대화 시기의 생활사를 살펴보고, 조선 시대 이후 여성 의례의 위치 변화를 돌아본다. 최치원의 〈막스 베버의 ‘방법론’ 번역과 문화자본〉은 《문화과학 및 사회과학의 논리와 방법론》 번역 출간을 계기로 베버 사상의 핵심적 테제를 짚어보며, 기존의 여러 번역본과 새로운 번역본을 비교해 논평한다.

‘에세이’는 책이라는 경계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형식의 학문적 논설을 소개한다. 배세진의 〈정세 속에서 인류학 하기: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비판 이론에 관하여〉는 《불쉿 잡》 번역 출간을 동인으로, ‘행동하는 지식인’ 그레이버의 사상적 여정을 따라가며 그가 개진한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정치철학을 해체하는 정치철학”으로, 또 정세 속에서 인류학을 실천한 비판 이론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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