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7:20 (금)
문화비평_달라요!(It's different!)
문화비평_달라요!(It's different!)
  • 김영민 한일장신대
  • 승인 2005.12.0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이를 느껴 보세요!'(Feel the difference!)라고, 돈을 먹은 나레이터들은 그 돈이 만든 차이를 개성 있게 내뱉는다. 그러나 그들은 등가성의 환각에 기댄 이 차이가 귀착하는 곳을 상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돈을 먹은 놈이 말을 하지요!'(Money talks!)라고들, 또 다시 돈과 차이를 등치시키면서 상식은 돈이 만들어내는 차이들의 세계를 힘주어 말한다. '달라요!'(It's different!)라고.

그러나, '다르다'는 메시지의 내용은 '(…)'는 그 발화의 매체형식에 의해서 쉼 없이 떠밀려간다. 보드리야르의 오래된 도식처럼, 그것은 한 때 (꽤 양심적이게도!) 차이의 부재를 은폐하는 이미지들의 浮游이었다가 마침내 그 차이의 실재와 완벽하게 동떨어진 이미지/기표(시뮬라크르)들의 잔치로 둔갑해간다. 미래사회의 체계론에서는 '차이는 관념'이며, 거꾸로 다시 '그 관념이 실재'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문화의 불안'에서 그 유명한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Narzismus der kleinen Differenzen)을 말한다. 사랑에 의한 동질감과 그 유대성은 홀로 서지 못하고 적대와 공격의 표시를 가진 타자들을 필요로 하는데, 그 표시가 곧 '작은 차이'이며, 이 차이에 대한 나르시시즘이 사랑의 유대감으로 되먹임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개념은 종교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지역주의 등, 갖은 박해의 사회심리적 메카니즘을 해명하는 데 매우 편리한 장치다. 그러나 (어느 자본제적 역사종말론자의 말처럼) 사회적 인정투쟁 자체가 자본주의의 코드 속으로 전일화한 작금의 현실 속에서, 프로이트의 개념은 박해보다는 자본주의적 과시와 환각을 밝히기에 더 유용해 보인다. 요컨대, '차이'라는 선전의 요체는 나르시시즘과 차이의 관계가 오히려 역전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환각이라는 것.

이것은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의 이데올로기를 토론하는 중에, "문화산업의 생산물은 자신의 향유불가능성 때문에 필요로 하는 선전 자체와 결국은 동일해지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밝힌 이치와 정확히 일치한다. '차이'가 영원해지려면 결국 그 차이의 내용은 아무도 모르게 捨象되어야 하는 법!

'달라요!'(It's different)라는 선전이 다름 아닌 핸드폰의 광고라는 사실은 내게는 매우 극적이다. 나는 핸드폰이 전자정보시대의 '거울'이라는 논지의 글을 여럿 발표했는데, 아는 대로 거울은 곧 이 작은 차이의 나르시시즘이 쉼 없이 생성되는 상상적 관계이고, 핸드폰으로서의 광고, 혹은 광고로서의 핸드폰은 그 상업주의적 환각의 관계를 첨단에서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달라요!'라는 광고의 상업주의적 유희가 倒錯的으로 도착하는 곳은 자본의 몰역사성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곧 이글턴(T. Eagleton)이 지적한 바, 과도하게 역사화하려는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상업적 충동이 몰역사적으로 전복되는 곳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그 작은 차이들을 역사화하려는 충동이 '선전의 일차원성'(마르쿠제)을 통과하는 가운데 차이의 관념론으로 희석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만 더 나가면, '성급한 후기자본주의적 역사화로 말미암아 상징화를 비껴가는 실재의 중핵을 놓친다'(지젝)는 정신분석의 풍경이 펼쳐진다.

벤야민은 보들레르를 빌어, '스스로의 환(등)상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를 현대라고 명명한 바 있다. 나는 이같은 환(등)상 속에서 작은 차이들의 불나비들이 엮어내는 나르시시즘의 무도회를 본다. 그 무도회는 곧 '정상이라는 우리 시대의 病'(아도르노)이며, '무의식이 된 정통'(G. 오웰)이다. 아직도, 달-라-요???

김영민 / 한일장신대·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