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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7] 모든 도덕 문화는 영혼의 내면적 삶에서 생긴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7] 모든 도덕 문화는 영혼의 내면적 삶에서 생긴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4.18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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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폰 훔볼트
빌헬름 폰 훔볼트. 사진=위키미디어

독일은 아나키즘 전통이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약하다. 그럼에도 독일인이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국가 숭배에 젖어있다고 하는 신화를 의심케 만드는 뛰어난 아나키스트가 독일에는 몇 명이 있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사회와 국가의 구별을 부정하고 시민들이 국가를 통해서만 자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안, 그와 가까운 동시대 사람인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Christian Carl Ferdinand von Humboldt, 1767~1835)가 합법적인 국가 행동의 한계를 좁게 설정한 것도 그 하나의 보기다. 

빌헬름 폰 훔볼트는 지리학자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Friedrich Wilhelm Heinrich Alexander Freiherr von Humboldt, 1769~1859)의 형인 언어학자다. 누가 더 유명한지를 따질 수는 없으나 인터넷에서 ‘훔볼트’를 검색하면 후자가 나온다.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동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예술가,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토머스 제퍼슨은 그를 ‘당대 최고의 걸출한 인물 중 하나’라고 불렀고 찰스 다윈은 “훔볼트의 『신변기』를 읽는 것만큼 내 열의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고 한 것도 모자라 “훔볼트가 없었다면 비글호를 타지도 않았을 것이고 『종의 기원』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를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시킨 혁명가 시몬 볼리바르는 훔볼트를 “신세계의 발견자”라고 불렀고 “모든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에서 한 일들을 다 합해도, 훔볼트 한 사람이 한 일보다 적다”고 했으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훔볼트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깨달은 것이, 나 혼자 몇 년 동안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 많다”고 말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나의 관찰 및 서술 방법은 훔볼트의 『자연관』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독일 훔볼트재단이나 한국훔볼트회의 훔볼트도 알렉산더 폰 훔볼트다. 단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의 훔볼트는 빌헬름 폰 훔볼트이다. 

찰스 다윈은 “훔볼트의 『신변기』를 읽는 것만큼 내 열의를 자극하는 것은 없다”고 한 것도 모자라 “훔볼트가 없었다면 비글호를 타지도 않았을 것이고 『종의 기원』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빌헬름 폰 훔볼트는 아우 정도의 범세계적인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언어학자로서 아나키스트인 놈 촘스키가 그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이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아나키스트로 다루어지지도 않는다. 아나키즘 사상가로서의 훔볼트의 명성은 『국가 활동의 한계 규정 시도를 위한 생각들』(1792)이라는 한 권의 책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은 1850년까지 출판되지 않았고, 1854년에 와서야 『정부의 영역과 의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출판되었으며, 그 뒤에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1859)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아나키스트 역사학자 막스 넷틀라우는 훔볼트의 그 책을 “본질적으로 아나키스트적인 사상과 권위주의적 편견이 기묘하게 뒤섞인 책”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밀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 여하튼 한글로는 2019년에야 번역되었으니 책을 쓴지 227년이 지나서였고, 그것도 완역이 아니다.  

 

라이프니츠의 이론, 루소의 믿음, 칸트의 강조를 통해 인간을 통찰한 훔볼트

1776년 독일의 포츠담에서 태어난 훔볼트는 프랑크푸르트(오데르)와 괴팅겐의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했다. 1801년부터 프로이센의 교황청 주재 외교 사절로 로마에서 6년을 보냈고, 귀국 후에는 문화교육국장으로 프로이센의 교육 제도를 개혁했다. 그는 인간의 자유를 교육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개개인의 능력을 균형 잡힌 최상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 과정에서 모든 국가적 통제가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가 주도한 교육 개혁 정책에 반영되었으며, 뒤에 훔볼트 대학으로 개칭된 베를린 대학의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만년에는 베를린 근교의 테겔 성에서 15년간 지내면서 20세기 언어학의 발달에 영향을 끼치는 비교 언어 연구에 몰두했고, 1835년 68세로 죽었다. 대표작으로는 『국가 활동의 한계 규정 시도를 위한 생각들』 외에 『역사 저술가의 과제에 대하여』(1822) 등이 있고, 유작으로는 세 권으로 출간된 『자바 섬의 카위어에 대하여』(1836∼1840)가 있다.

훔볼트가 주도한 교육 개혁 정책에 반영되었으며, 뒤에 훔볼트 대학으로 개칭된 베를린 대학의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위키미디어

훔볼트는 계몽주의의 급진적인 메시지, 특히 라이프니츠의 인간 완전성 이론, 도덕적 자기 결정이 인간 존엄성의 본질이라는 루소의 믿음, 그리고 각 개인을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취급하지 않고 목적으로 볼 필요성에 대한 칸트의 강조를 흡수했다. 이를 위해 그는 완전히 둥글고 조화로운 인간성을 지닌 고대 그리스 모델의 이상화를 추가했다. 

훔볼트의 출발점은 창의적인 개인이고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양한 상황에서 가능한 가장 넓은 자유로 최대의 개성을 달성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만이 사회의 활력을 구성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따라서 자기 교육은 그의 정치 이론의 핵심 개념이다. 훔볼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참된 목적은 영원하고 불변의 이성에 의해 규정되고, 막연하고 일시적인 욕망에 의해 제시되지 않는 것으로서, 그의 힘이 완전하고 일관된 전체로 발전하는 가장 높고 조화로운 것이다. 자유는 그러한 발전 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첫 번째 불가결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조건은 각 개인이 ‘자신의 에너지에 의해, 자신의 완벽한 개성에 의해 자신을 발전시키는 가장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고 이 원칙은 모든 정치체제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을 위한 더 큰 자유와 상황

훔볼트는 개인과 사회를 유기적이고 미적으로 꽃피는 식물과 예술작품으로 보았지만, 국가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후대의 아나키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국가와 사회, 또는 그가 국가 헌법과 국가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을 구별한다. 즉 “엄밀히 말해서 후자, 국가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협력은, 사람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갈망했던 모든 이익을 보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또한 큰 틀에서 사람은 단순히 ‘사람이 스스로 행동하면 할수록 더 많이 발전한다’는 하나의 도구로 쉽게 되기 때문에 작은 조직을 권고한다. 

훔볼트가 정부에 대해 비판한 근거는 개인의 자율성과 진취성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혹은 가르침과 지도의 결과일 뿐인 것은 무엇이든 그의 존재 자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의 본성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는 진정으로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계적인 정확성으로 행하는 것이다.” 또한, “자유는 다양하고 무기한 활동의 가능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훔볼트는 ‘인간의 에너지를 위한 더 큰 자유, 그리고 더 다양한 상황과 상황’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시민의 긍정적인 복지를 추구하는 가부장주의 국가는 해롭다. 대상을 어린아이로 대함으로써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막고, 자신의 획일적인 성격을 강요함으로써 경험의 질을 떨어뜨리고, 그들의 진취성과 독립성을 약화시킨다. 선을 행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에너지를 흡수하고 동정과 상호 원조를 약화시킨다. ‘모든 도덕 문화는 오로지 영혼의 내면적 삶에서 바로 생겨난다’, ‘사람의 자유가 클수록 타인을 향해 자립적이고 잘 처신하게 된다’는 점에서 결코 시민들의 도덕성을 향상시킬 수 없다.” 

 

다양한 개성과 독창적 독립 그리고 인간 간 심오한 결합

훔볼트는 아나키스트의 경계에 이르렀지만 결국 자유진영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상당히 독립적으로 아나키스트적인 결론에 도달하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없다. 사진=위키미디어

훔볼트는 불필요한 정치적 규제를 거부하면서 아나키스트 사회의 가능성을 고려했다. “만약 우리가 가장 진실한 사례에서 완전히 지시된 깨달은 남성들의 공동체, 따라서 상호적으로 잘 처분되고 밀접하게 결합 된 공동체를 상상해본다면, 우리는 그들 사이에 어떻게 자발적인 계약이 체결될 것인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합의는 어떤 국가 협정보다 훨씬 선호될 것이다.”

훔볼트의 이상적인 사회는 각 개인이 독립적이면서도 사회의 일부가 아나키즘적 사회주의와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 친목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장 다양한 개성과 가장 독창적인 독립’이 ‘인간의 가장 다양하고 심오한 결합’과 동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 정치 조직의 종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가장 절대적인 자유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본질적으로 훔볼트는 야경국가가 시민들을 감시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 주요 역할은 부정적이다. 즉 외국 적들의 외부 공격과 내부 불화에 대한 보안을 유지하는 것이다. 토마스 페인과 마찬가지로, 그는 국가가 필요한 수단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자유의 제약과 함께 있기 때문에, 필요악이다’. 국가 간섭의 유일한 정당성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리하여 아나키스트의 경계에 이르렀지만 훔볼트는 결국 자유 진영에 남아 있었다. 이것은 그의 동료 프리드리히 니체가 상당히 독립적으로 아나키스트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과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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