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3:15 (목)
교수는 어떻게 추락하고 있는가 
교수는 어떻게 추락하고 있는가 
  • 김진석
  • 승인 2022.04.21 08: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_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자칭 지식인들이 지식을 생산적인 사회적 자본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셈이다. 
그리곤 시대에 뒤쳐진 지식을 팔아먹는 지식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교수들에게 남은 과제는 사회적 문제인 ‘그들의’ 대학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다. 
구조조정이 빈번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형식적인 변화만 있었고, 개혁에 걸맞은 변화는 없었다.

학과정원에 매달리면서 학과별 입시성적과 자퇴 및 전과 학생들 숫자 때문에 전전긍긍한다면, 
교수의 미래는 어둡다. 학과 조직 이기주의가 실제로 대학 개혁을 방해하고 있다.  

대학은 사회적 문제 덩어리이다. 줄어드는 고졸자, 시름시름하는 지방 국립대, 대졸자 취업난, 비정규직 교수들의 불만. 입시제도에 기생해 왔던 교수들의 지위는 초라하고 바닥에 가깝다. 대학 평가가 입시성적과 별개로 이루어지고 연구업적 평가도 따로 이루어지지만, 입시 제도는 대학 시스템에 압도적 영향을 미친다.

서울권 대학 교수들은 위기를 별로 느끼지 않을 것이나, 오히려 이것이 위험이다. 괜찮다는 착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위기는 더 깊이 침투하고 있다. 교수들은 부실한 대학제도 덕택에 쉽고 편하게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들 문제를 바꾸기 위해 변화와 개혁이 필요했지만, 교수들은 이제까지 앞장서지 못했다. 과도한 비판일까?

'논문'답지 않은 논문, 실패한 지식 생산

여러 위험들이 곪아왔다. 교수들은 자신을 지식인으로 정의해왔는데,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연구실적 평가 제도는 논문을 정량화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만, 성공은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논문은 세분화된 전공이나 학회의 칸막이 안에서 답답하게 머물고 있다.

논문들은 형식적으론 숙련된 기술을 갖추었지만, 다른 논문들을 짜깁기하면서 깨작거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창의성을 살리기보다는 연관된 텍스들을 교차 인용하는 경향이 크며, 그렇게 칸막이 안에서 세분화된 지식들은 실용성 및 창의성과 거리가 멀다.

더욱이 논문들은 생산적인 토론이나 논쟁을 유발하지 못한 채, 오히려 칸막이 된 학회들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 노릇을 하는 면이 크다. 같은 연구 영역에 속하는 교수들도 논문 심사를 제외하고는 서로의 연구에 대해 생산적으로 읽고 토론하지 못하고 있다. 심사자 세 사람밖에 읽지 않는 논문이라는 자조가 스멀스멀 교수들을 갉아먹은 지 오래인데도, 자멸적인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필자는 이전에 국내 대학이 일급 이론을 생산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연구자들이 단순히 외국 이론을 가져다 쓰는 데 급급했기 때문은 아니다. 그 이론을 따르는 교수들은 국내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생산적인 논의를 하는 데 실패했다. 자칭 지식인들이 지식을 생산적인 사회적 자본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셈이다. 그리곤 시대에 뒤쳐진 지식을 팔아먹는 지식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 와중에 대중문화와 SNS가 그들을 사납게 삼켜버렸다.

"오래된 학과별 정원 제도는 빠르게 변화한 사회적 필요에 거의 부응하지 못하는데, 왜 그것을 떠받들며 학과 취업률을 따지고 그에 따라 대학을 평가해야 하는가" 사진=펙셀

보편적 지식인은 이미 사라졌다

물론 지식의 쇠퇴는 물론 단순히 국내적인 현상은 아니며, 또 그저 교수들 개인의 자질 부족에서 생긴 것도 아니다. 그 위기는 외국에서도 이미 한 세대 전부터 여러 각도에서 관찰되어 왔다. 보편적인 지식을 대변했던 보편적 지식인은 이미 20세기 초중반에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각 기능 영역의 전문가들이었다. 이 변화는 단순히 부정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특수한 기능성을 고려하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국내의 많은 교수들이 아직도 자신을 보편적인 지식인으로 이해한다는 데 있다. 이들은 기능적 정보가 보편적 지식을 대체하거나 밀어낸 엄청난 변화를 어정쩡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문과대와 사회과학 교수들은 이 변화에 의해 크게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많건 적건 실용성이라는 요구에 발을 맞추고 있는 공학 교수들은 이 지식인의 위기에서 벗어나 있는가? 아니다. 보편적 지식인보다는 실용성을 갖추었지만, 그들의 지식도 조직으로서의 기업과 시장이 주도하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지식이 존중받는 사회에서 빠른 정보 처리 과정이 요구되는 사회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불행하게 교수들은 이 틈에 끼어 납작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지식에서 정보로의 전환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흔히 정보는 생산성을 높인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보는 거기에 그치지 않으며 위험한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데이터 가운데서도 자극적인 것이 정보 값을 크게 가지기 때문에, 사회는 복잡한 진실보다는 요란한 소음과 소란에 이끌리는 치명적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나마 공적인 기사를 생산하려고 했던 대중매체가 급격히 쇠퇴하는 일이 우연히 일어나는 게 아니다. 과거 대중매체들은 많은 경우 그래도 지식인을 준거점으로 삼았지만 이제 기자들은 이리저리 SNS를 뒤쫓아 다니고 있으며, 그들도 쇠퇴하는 지식인 그룹에 속한다.

형식적 변화만 있었고 개혁은 없었다 

대학 시스템의 혁신이 필요하지만, 교수들이 이걸 할 수 있을까? 부끄럽게 대학 시스템에 기생하는 면이 큰 처지에, 이걸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사회의 개혁이나 혁신을 이끌 수 있을까? 일단 사회 개혁의 주체로서의 지식인에 관한 거대 담론은 피하는 게 좋다. 전통적 지식인의 권위가 불쌍할 정도로 쪼그라들었을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정치 세력에 기생하면서 지적인 공정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보수 쪽 교수들이 더 정치에 기생했다면, 최근 몇 년 동안은 자칭 진보 교수들이 더 그랬다. 지식인임을 내세우면서 정치세력과 진영논리에 기생했으니, 자신들의 지적인 권위를 까먹은 셈이다. 이제 선거에서 특정후보를 지지하면서 서명하는 교수들은 사람들에게 우습게 보인다.

교수들에게 그나마 남은 과제는 사회적 문제인 ‘그들의’ 대학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다. 이제까지 못했던 대학 개혁이라도 조금 실행하는 일이다. 30년 이상의 재직 기간 가운데 거의 20년 동안 필자는 구조조정에 시달렸다. 물론 문과대학, 더욱이 ‘철학과’ 교수라서 시달린 면도 있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빈번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형식적인 변화만 있었고, 개혁에 걸맞은 변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한 예만 들어보자. 현재 국내 모든 대학에서 유지되는 학과별 학생정원이라는 틀이 있는데, 학과 학생들을 담보로 삼는 구시대적 제도이며 미래를 위한 변화를 막는 장애물이다. 교육부가 총장 협의체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권한을 위임한 이후 이 단체가 학과별 입학정원을 통제하고 있는데, 교수들도 여기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다보니 마치 이것이 전공이나 연구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여기는데, 이 착각 또는 자기정당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처음에는 인재의 균형이라는 취지가 있었지만, 이제는 경직된 조직 이기주의의 폐해만 극심하다. 거기에 매달리면서, 오히려 자율성도 훼손되고 연구의 질도 떨어지고 있다. 최고 지성이라는 교수들이 다른 사회 조직보다 더 조직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면, 말이 안 된다. 수도권집중 현상을 고려하면 대학별 정원은 신중하게 관리해야 하고, 단과 대학별 쏠림도 관리할 필요가 있다.

학과별 정원이라는 조직 이기주의

그러나 학과정원은 폐지하는 게 옳다. 물론 처음엔 학과별 쏠림이 있을 것이고 약한 학과들은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그에 따른 세부적인 대책도 필요할 것이다. 교수진의 약화를 피하려면, 칸막이 학과를 넘어 통합 학과를 운영하면 된다. 물론 불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과정원에 계속 매달리면서 학과별 입시성적과 자퇴 및 전과 학생들 숫자 때문에 전전긍긍한다면, 교수 의 미래는 어둡다. 각 학과들의 조직 이기주의가 실제로 대학 개혁을 방해하고 있는 면이 매우 크다.  

교수는 자신을 자율적 연구자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국책 연구비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연구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그 사업들이 실제로 얼마나 효율성을 가지는지 의심스럽다. 성공적으로 수행됐다고 많은 경우 평가되지만, 기초 연구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기업이나 산학 연구소에 밀리는 경향이 크다. 이처럼 국가 연구비에 의존하고 기업에 밀리는 상황에서, 더욱이 학과별 정원이라는 조직 이기주의에 매달리는 한, 교수의 지적 자율성은 말할 것도 없고 지적인 경쟁력과 사회적 자본도 끝없이 약화될 것이다.

자격증과 관련된 일부 학과를 제외하면, 학생들에게 진로 선택 기회를 주는 방향이 여러 점에서 좋다. 오래된 학과별 정원 제도는 빠르게 변화한 사회적 필요에 거의 부응하지 못하는데, 왜 그것을 떠받들며 학과 취업률을 따지고 그에 따라 대학을 평가해야 하는가. 또 취업률이 학과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에서 교수들은 졸업생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상당수 교수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을 떠맡은 교수들은 스스로를 무책임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교육부도 매년 지원금을 빌미로 대학을 통제하는 구태를 버리고, 관련 법규를 철폐하라.

김진석 인하대 교수·철학과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비평가. 저서로 『진보는 차별을 없앨 수 있을까』, 『강한 인공지능과 인간』, 『소외되기-소내되기-소내하기』, 『니체는 왜 민주주의에 반대했는가』, 『기우뚱한 균형』, 『포월과 소내의 미학』, 『초월에서 포월로』 등이 있다. 계간 <사회비평> 편집주간, 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