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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다양한 삶, 다양한 싸움
여성들의 다양한 삶, 다양한 싸움
  • 심정명
  • 승인 2022.04.22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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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19세기 허스토리: 생존자의 노래, 개척자의 지도』 노서경 외 5인 지음 | 마농지 | 372쪽

선언으로만 존재하던 보편적 인권·만인의 자유와 평등
생존을 위해 분투했던 아프리카계 여성도 자유를 갈구

사람들은 역사에서 아마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지금은 일상적으로 가능해진 많은 일들이 실은 지난한 싸움 끝에 얻어진 것들이라는 사실인 듯하다. 지금 우리가 근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태동했던 19세기, 선언으로서만 존재하던 보편적 인권이나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싸웠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19세기 허스토리』에 묶여 나왔다. 서양사를 전공한 여섯 명의 여성 연구자들이 쓴 이 책에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져 있지만은 않았던 다양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책의 첫 장은 생존을 위해 분투했던 수많은 여성 대중들 가운데서도 아이티혁명기를 살았던 아프리카계 여성들을 다룬다. 독자들은 사료와 문학작품을 오가면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네트워크를 재창조하며 자유로운 삶에 다가가기 위해 애썼던 유색인 여성 노예의 삶의 궤적을 저자와 함께 따라가고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누구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고 있는지, 공식적인 역사에 자신의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여성이나 피지배계급의 실재했던 삶에 당연한 듯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미국 여공들이 직접 소모임 만들고 공부

또한 산업혁명의 시기였던 19세기에 등장한 미국의 첫 세대 공장노동자인 로웰의 여공들을 다룬 다음 장에서는 이들이 직접 소모임을 만들어 공부를 하고 글을 쓰면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음을 배운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로서 줄곧 자기 신념에 충실했던 폴린 롤랑, 파리코뮌에서 활동하여 군사재판에 기소되었고 이후에도 정치연설을 계속하며 감옥에서도 계속 글을 썼던 루이즈 미셸, 미국에서 처음으로 여성참정권을 주장한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여성에게 평등한 교육과 고용 기회를 보장하라고 주장하며 언론활동을 계속한 독일의 루이제 오토, 빅토리아 시대의 가부장제와 젠더 규범을 영리하게 이용하면서 문학적 성취를 거둔 세라 콜리지 등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이렇듯 19세기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억압받은 사람들,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했던 여성이나 유색인종, 노예나 노동자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차별적인 제도에 맞서 싸운 여성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적지 않은 감동과 묵직한 독서의 즐거움을 준다. 그와 동시에, 책을 읽으면서 여전히 완전히 평등하지 않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갈등이나 어려움이 과거에도 유사하게 존재했음을 깨닫는다. 

 

전술적으로 인종주의적 언설에 편승

가령 캐디 스탠턴은 당시 미국의 상황을 백인 남성 지배층이 유색인 남성에게 먼저 시민권을 보장하면서 형제적 관계를 형성하는 국면이라고 판단하고, 여성에게 참정권이 없는 부조리함을 주장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인종주의적 언설에 편승한다. ‘보편적’인 권리를 얻기 위해 누가 ‘인간=시민’에 더 적합한지를 둘러싸고 제로섬 게임처럼 다투는 것은, 결국 그 구체적인 속성만 달라질 뿐인 ‘배제되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낳는다는 것을 여기서 독자들은 다시금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캐디 스탠턴에 대한 평가는 갈릴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은 여러 가지 시대적 제약과 개인적 한계들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더 나은 세계를 향해 자신의 삶을 걸었던 여성들의 모습에 섬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연대하고 나와 다른 이들과 관계 맺을 수 있을지를 다시금 고민하게 만든다.

각 장의 말미에는 저자들이 소개하는 사료들이 있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19세기를 살아냈던 많은 여성들의 다양한 삶과 생각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책에 소개된, 그리고 책에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과거를 살았던 여성들이 때로 병약하거나 타협적이었을 때조차 얼마나 굳세었는지 느끼게 된다. 거기에 실린 어떤 말들은 오늘날도 여전한 박력으로 독자의 마음을 흔들 것이다. 그렇게 싸워왔던 여성들의 시간 위에 지금 우리가 있다.

 

 

 

심정명
조선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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